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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자유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자처하는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평생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감내한 이유는 귀족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궁정 음악을 벗어난 자유 음악가로의 꿈


베토벤은 궁정악단에 종사하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태생적으로 궁정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혼란과 격동이 혼재하는 격변의 시대에 베토벤은 안정적인 궁정 음악가의 길을 거부하고, 자유 음악가1)의 길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당시 자유 음악가는 감당해야 할 경제적 리스크가 큰 탓에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자유음악가의 길을 시도한 선배 음악가들이 실패했기에 그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교회가 주는 고정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개최하여 이익을 얻는 길을 모색한 비발디2)나 모차르트가 끝내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을 모두가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1)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 비발디가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난 사례라면, 베토벤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로 자유음악가의 꿈을 실현한 고전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2) 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 이탈리아의 작곡자이자 연주자이면서 사제. 오페라 등 새로운 영역을 시도하며 음악 대중화에 힘썼지만,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흥행 요소’가 있는 음악 활동을 금지 당해 가난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것은 그 영광만큼의 커다란 고통과 고난이라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의 길을 택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랑스 혁명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로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군주제 아래서 군주, 귀족이 조직한 악단에서 급여를 받고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 내지 하인으로서의 음악가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모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기 시작한 상태에서 베토벤이 선택한 자유 음악가의 길은 고난이 예정된 미래나 다름없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난청 증세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고독한 운명을 이겨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토벤의 생애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더욱이 1809년이 되자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날로 위세를 떨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침략하면서 음식비가 매년 무려 50%씩이나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3)는 이와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 탄생한 곡입니다. 전쟁을 피해 귀족들 대부분이 빈을 떠났지만 베토벤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남아 창작에 집중했습니다. 자유 음악가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베토벤이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 그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전쟁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큰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악보 출판과 음악회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음악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끝없는 가난, 끊임없는 독립의 꿈


나폴레옹군의 빈 진주 당시 베토벤이 스스로 물가를 기록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은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해르텔’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구두 한 켤레를 30플로린, 코트 한 벌을 60~70플로린에 구입했는데, 1792년에는 6플로린이었던 구두를 1810년에는 30플로린에 구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서술을 보면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가 1792년에서 1810년 사이에 무려 여섯 배나 상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베토벤의 편지에는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1816년 람베르티 백작으로부터 임차한 주택으로 이사했는데, 임차료가 무려 500플로린에서 5,500플로린으로 10배 이상 올랐다.’는 푸념도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이 당시 빈의 피아노 제조업자 난네테 쉬트라이허에게 쓴 편지에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베토벤의 친구이자 악보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4)는 비교적 저렴한 빈 교외로 이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때 베토벤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벽지를 직접 도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4) 토비아스 하슬링거(Tobias Haslinger) : 음악상의 경영자이자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한 출판업자이다. 베토벤은 시외에 살며 빈 시내에 들를 때마다 하슬링거의 상점을 찾아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개인 사교장처럼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음악 도시 빈에서 명성을 얻은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생애 최초로 자신이 기획하여 수익을 갖는 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1800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극장에서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 음악가의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정신과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귀족의 후원에 기대지 않는 자유 음악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지만 악보 출판업의 부흥 등 주변 환경의 변화는 이 같은 베토벤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하고,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6~7개 유명 악보 출판사의 러브 콜을 받는 등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1807년에는 황제의 궁정 악장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전임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받았던 연봉의 두 배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황제 궁정악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작곡해야 하는 작품 중 오페라가 3번 이상 공연될 경우 세 번째 공연부터는 그 수익을 자신이 가져가고, 연 1회 개인적 음악회를 허용해 달라는 파격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물론 이 같은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베토벤이 세계 최고의 궁정악장 자리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고유의 예술 세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황제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자리도 베토벤이 가진 자유 음악가에 대한 꿈을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 혹은 소송


베토벤의 삶은 자유 음악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독립과 예술적 자유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806년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5) 공작이 오스트리아에 진격해 온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베토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토벤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원이 중단되면서 베토벤은 다시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5)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Karl von Lichnowsky) :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 모차르트에 이어 베토벤을 후원했다. 1800년부터 1806년까지 베토벤에게 매해 600플로린을 제공했으며,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걸작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베토벤이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를 알아차린 신생국 베스트팔리아 왕국의 왕이자 나폴레옹의 친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왕국의 수도 카셀의 궁정악장직을 베토벤에게 제의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연금보다 거의 네 배 이상의 거액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토벤을 빈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빈의 음악 애호가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 롭코비츠 공작이 각각 1,800플로린, 1,500플로린, 7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총 4,000플로린이 모였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가 약속한 연봉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기에 베토벤은 빈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사용하면서 통화 수단이던 플로린은 1811년에 가치가 폭락하였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약속받은 연금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루돌프 대공만이 간신히 연금을 지급하였고, 킨스키 공작은 파산 후 사망하였습니다. 롭코비츠 공작도 파산을 선언하며 연금의 지급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1813년 롭코비츠 공작과 1815년 킨스키 공작 가문에 각각 소송을 제기하여 밀린 연금을 받아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소송까지 해서 후원금을 강요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거나 베토벤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마치 6.25전쟁 직후와 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후원이 끊기자 베토벤에게 남은 수익 모델은 악보 출판업자를 통한 악보 판매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당시는 출판사에 작품을 넘기면 일회성으로 뭉칫돈을 받고 이후의 판매 독점권까지 양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과정에서 작품 번호6)를 잘 챙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출판을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잘 관리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인데요. 훗날의 일이지만 베토벤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악보 출판 시 작품 번호를 기준으로 저작권의 혜택을 받고 자유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저작권법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6) 작품 번호(Opus Number) : 오푸스(Opus)는 작품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보통 약자를 써 Op.1, Op.23 등으로 클래식 작품에 번호를 붙인다. 작품 번호는 17세기 후반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며 표지에 기재되기 시작한 방식이다. 베토벤은 스스로 자신의 음악 작품에 번호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로, 그의 사후 발견된 유작에는 ‘WoO. 번호’를 매긴다. ‘WoO.’는 ‘작품 번호 없음(Werks Ohne Opuszahl : Works without Opus number)’ 이라는 뜻이다.


당시 음악가들은 초판에 한해서만 출판업자로부터 판매 수입을 배당받고 재판부터는 배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색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먼저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정식 출판하기 전 6개월에서 12개월 사이의 독점 사용권을 귀족에게 판매했습니다. 사용권이 만료되고 나면 비로소 출판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작품을 여러 번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장엄 미사곡 Op.123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출판을 시도해 작품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먼저 독일 본의 출판업자 니콜라우스 폰 짐록에게 Op.123의 3년 독점 사용권을 판매했고, 친구이자 출판업자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라이프치히의 페터스 출판사,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타리아 출판사, 마인츠의 쇼트(Schott)7) 출판사, 총 네 곳에 3년 후 판매를 조건으로 같은 작품을 재판매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장엄 미사곡의 초판 첫 페이지에 자신의 서명을 쓴 악보를 총 28개 만들어 궁정악단에 판매하고,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10개국의 주문을 받아 추가 수입을 올렸습니다.


7) 쇼트(Shott) : 베토벤과 악보 출판계약을 맺었던 출판사로 1770년 창립해 250여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 출판 기업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는 물론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클래식 거장들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귀족에게는 일정 기간 독점 사용권 비용을 받고, 이후에 다시 다양한 루트의 출판을 모색하고 여기에 초판 사인본의 판매와 해외 판매까지, 베토벤은 단 한 작품으로 수많은 버전을 만들어 재판매하며 상당한 부가 수익을 거둬들였습니다. 음악사상 실질적으로 처음 자유 음악가의 길에 들어선 베토벤은 이처럼 경제적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고, 이러한 노력은 후배 음악가들이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데 훌륭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악보에 번호를 붙이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이것은 더 많은 출판 수익을 거두기 위해 찾아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번호에는 숫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조병선 청주대학교 법학과 교수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법학박사. 사법연수원, 법과대학원 등에서 ‘법과 음악’을 주제로 한 강의를 하고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 진행한 <클래식 법정>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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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기 기자의 자동차 칼럼

<예술 작품으로 변신한 자동차>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 까스텔바작(Castelbajac). 지난해 겨울, 그는 르노삼성 SM6를 도화지 삼아 걸출한 아트카(Art car)를 빚었다. 빨강, 파랑, 노랑 등 현란한 색동옷과 함께 수호천사를 그렸다. 



▲ 까스텔바작의 르노삼성 SM6 아트카


정신없는 낙서처럼 보이지만 속에 담긴 의미는 가볍지 않다. 따뜻함, 열정, 사랑을 품은 수호천사는 탑승자의 안전을 보호한다. 또한, 한불 수교 130주년과 ‘올해의 안전한 차’를 수상한 SM6를 기념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동차와 미술의 협업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독일의 BMW는 지난 1975년부터 아트카를 빚어 왔다. 프랑스 태생의 ‘에르베풀랭(Herve Poulain)’은 주말이면 BMW를 타고 서킷을 누비는 아마추어 레이서이자 미술품 경매가였다. 그는 경주차에 “스폰서 광고 대신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하고 생각했다. 



▲ 알렉산더 칼더가 디자인한 BMW의 첫 번째 아트카


BMW 첫 번째 아트카는 모빌의 창시자이자 조각가인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가 맡았다. 에르베풀랭과 칼더가 돈독한 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BMW는 그에게 3.0 CSL을 주었고, 칼더는 오롯이 자신의 스타일로 아트카를 빚었다. 참고로 BMW 아트카는 단순히 박물관용이 아니다. 실제 경기에 투입한다.




서킷에 등장한 아트카는 그야말로 좌중을 압도했다. 모두가 스폰서와 상업 광고를 차체에 실을 때, BMW는 예술품을 격전지로 보내며 존재감을 뽐냈다. 이를 계기로 BMW는 매년 1명의 작가를 선정해 아트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이후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프 쿤스 등이 차례로 붓을 잡았다. 



▲ 프랭크 스텔라가 디자인한 BMW 아트카


19대의 아트카 중 가장 좋아하는 BMW를 꼽으라면,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작품이다. ‘검은 회화’로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스텔라는 추상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보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 그 자체다”라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표현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알렉산더 칼더의 아트카가 화려한 옷을 입었다면, 스텔라의 아트카는 검은 줄로 칭칭 감은 게 특징이다. BMW는 1976년 스텔라의 아트카를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 참전시켰다. 단순히 기록 대결뿐 아니라 자동차 경주의 또 다른 장르를 개척했다.



▲ 존 발데사리와 그가 디자인한 BMW 아트카


가장 따끈따끈한 아트카는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가 빚은 19번째 작품이다. 그는 M6 GTLM을 밑바탕 삼아 독특한 경주차를 빚었다. 존 발데사리는 현란한 붓질보단 텍스트와 상징 기호를 통해 작업하는 걸 좋아한다. 그는 인공과 자연, 군중과 개인, 남성과 여성, 혼란과 질서, 과거와 현재, 사랑과 미움 등을 대비시켜 긴장감을 만든다.




사실 그동안 아트카 프로젝트를 맡은 작가들은 조각이나 회화, 팝아트 등 시각적인 즐거움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존 발데사리는 ‘개념미술가’다. 그래서 기존 아트카와는 다르게 다소 휑해 보이기도 한다. 가령, 차체 왼쪽 측면에 “FAST(빠르다)” 문구를 새겼고, 오른쪽 측면엔 자동차 이미지를 그렸다. 또한, 지붕과 보닛 위에 빨간 점과 노란 점을 찍었다. “빠르다”를 대담하게 외친 M6 GTLM은 롤렉스 데이토나 24시 경주에 참여해 6위로 결승선을 밟았다.



▲ 키스 해링이 디자인한 랜드로버 아트카


영국의 랜드로버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Keith Haring)과 손잡았다. 키스 해링은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만든 화가. 그는 195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나, 커츠타운(Kutztown)이란 작은 마을에서 성장했다. 


어린 해링은 자신을 둘러싼 답답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 해결해줄 도구는 두 가지뿐. 잡지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접하고, TV를 보며 월트 디즈니 같은 대중문화를 알게 됐다. 


1960~70년대 미국은 페미니즘과 인종차별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시기다. 기술의 발전으로 하루가 다르게 온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혼동 속에서 청소년기 보낸 해링은 자연스레 사회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 키스 해링(Keith Haring)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해링은 격변의 중심, 뉴욕으로 향했다.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s)에 다니며 미술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그의 스승인 키스 소니어(Keith Sonnier)의 작업을 도우며 미술가의 개인전을 간접 경험한다. 그런데, 전시장 지키며 관람객을 관찰하던 해링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중들이 스승의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반대로 예술이 대중에게 인정받기는커녕 이해조차 시킬 수 없음에 당황했다. 


그해 겨울, 방황하던 해링은 길거리에 새겨진 낙서를 보았다. 평범한 낙서들이 지나가던 시민들에게 말을 걸었고, 이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분필을 사와 지하철에 자리한 시기 지난 광고판에 그림 그리기 시작했다. 단순 명료한 그의 그림은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가 작업하는 순간에 말을 건네며 자연스레 대화할 수 있었다. 빈번히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경찰서를 드나들었지만, 이러한 소통은 해링이 작업하는 이유이자 큰 원동력이 되었다. 


밝고 귀여운 그림과는 달리 해링은 골몰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평범한 낙서와는 다르게 강렬한 메시지를 세상에 던졌다. 인종차별 문제, 성 소수자 인권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쉽고 친근하게 풀어 대중에게 다가갔다. 



▲ 아트카 작업 중인 키스 해링


키스 해링의 그림은 1983년 색다른 캔버스를 만났다. 도화지의 주인공은 랜드로버 디펜더. 1971년형 시리즈 3 모델이다. 짙은 올리브색 도장 면을 그의 흔적으로 가득 채웠다. 멈춰있는 벽과는 달리 이곳의 흔적은 세상 곳곳 누비며 대중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차는 어떤 길도 달리는 랜드로버니까. 


3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 사회는 또 다른 혼동 속에 갇혀있다. 과연 그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할까? 





※ 본 콘텐츠는 집필가의 의견으로, 삼성화재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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