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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귀족들의 찬사를 받아 유명세를 얻은 모차르트였지만, 그는 음악이 궁정의 구경거리에 머물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모차르트의 진정한 천재성은 음악적 재능을 넘어 시대의 변화를 앞서 예견한 통찰력에 있습니다.



모차르트, 계몽의 시대를 읽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분명 음악사에 길이 남을 천재입니다. 그의 천재성을 예증하는 일화는 차고 넘쳐흐를 정도로 풍부합니다. 불과 여섯 살에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를 했다니 신동도 이런 신동이 없습니다. 신동 모차르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여섯 살이 되던 1762년에 떠난 유럽 연주 여행이 1766년에 끝날 정도였습니다. 뮌헨, 아우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뤼셀, 파리, 런던, 헤이그, 제네바, 베른, 취리히 등 유럽 주요 궁정에 모두 초대받았고 궁정 사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궁정의 셀레브리티였고 슈퍼스타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이런 열렬한 반응에 우쭐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천재란 시대적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외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천재도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무관한 채 특별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천재는 그 시대의 천재입니다. 각 시대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천재를 낳는 법입니다. 천재성에는 시대정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진정한 천재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를 파악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처럼 모차르트는 서른 다섯 살의 나이로 1791년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사망하기 몇 해 전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부르봉 왕가1)의 황제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와네트는 혁명이 일어나자 베르사유에서 압송되어 파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1) 부르봉(Bourbon) 왕가 : 프랑스의 왕조. 루이 13세, 루이 14세로 프랑스 절대 왕정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루이 14세에 이어 루이 15세, 루이 16세가 잇따라 왕위에 올랐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1792년 폐위되었다.


 


모차르트에 열광하던 궁정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사라지고 시민 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갑작스런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혁명의 전조는 있었습니다. 단지 명민한 사람들만이 이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는 계몽이라는 이상은 지금까지 의심받은 적 없는 낡은 질서를 의심하는 비판적 사유의 최고 형태였습니다.


사람들은 계몽의 빛을 받아들이면서 신분제조차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의 이상은 유럽을 슬며시 흔들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모차르트는 아마 아버지가 읽지 못했던 시대의 변화를 눈치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익숙한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편이었다면, 아들 모차르트는 머지않아 궁정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 예감했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대로 사회 질서가 지속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버지와 무엇인가 변화를 감지한 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모차르트는 더 이상 궁정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음악가는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다


신동도 언젠가는 어른이 됩니다. 분더킨트2), 즉 신동도 사춘기를 거치며 자의식이 생기고 자기 목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자의식이 생긴 아들과 관습을 추종하는 아버지 사이에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부자 역시 마찬가지였죠.


2) 분더킨트(Wunderkind) : 독일어로 놀라운 아이라는 뜻. 특히 음악, 문학 등 예술계의 조숙한 어린 천재나 신동을 일컫는 말로 널리 쓰인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지금까지의 궁정 음악가들이 살았던 방식대로 아들이 살기를 기대하고 강요했습니다. 우리는 모차르트를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천재 혹은 마에스트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차르트의 사후에 만들어진 명성일 뿐입니다.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의 음악가는 궁정에 소속되어 있는 수많은 하인의 한 종류였고, 음악가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시종이나 마차꾼처럼 하인의 옷을 입었고, 하인들의 부엌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하이든이 그렇게 살았고, 바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음악가의 이러한 처지에서 어떤 문제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전통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인데요. 그의 눈에 음악가는 본래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는 요한 밥티스트 백작 집의 악사였고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 봉직한 음악가였습니다. 그에겐 주어진 음악가의 처지 그 이상을 넘어서려는 야망도 궁리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호구지책이었습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천재성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때로는 서커스 공연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콘서트를 이렇게 홍보했습니다. “소년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합니다. 건반을 헝겊으로 완전히 덮어씌운 클라비어3)로 교향곡도 연주합니다. 게다가 멀리서 어떤 음을 들려줘도 정확하게 음 이름을 알아맞힙니다.” 모차르트의 재주를 흥행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업 감각을 지닌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따라온다면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들 모차르트는 성장을 거듭하며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만났습니다. 신동으로서의 인기가 점차 떨어지자 아버지는 아들 모차르트가 자신처럼 궁정에서의 안정된 일자리를 갖기 기대했습니다. 신하 음악가 혹은 신민의 처지에 충실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뜻과 달리 아들 모차르트는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3) 클라비어(Klavier) : 오늘날 피아노의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으나 1775년경까지는 일반적으로 쳄발로나 클라비코드 양쪽을 다 가리켰다. 또한 오르간이나 피아노 등 건반 악기의 건반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아들의 재능을 생계 수단으로 삼은 아버지는 궁정 음악가의 월급을 원했지만, 모차르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귀족의 후원과 월급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시민을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습니다.



궁정 예술가에서 시민 예술가로


궁정을 벗어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음악가를 시종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귀족들과 사사건건 부딪혔습니다.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25세의 나이에 궁정의 속박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에게 반발하다가 굴욕적으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아버지에게 설명하는 모차르트가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그는 악당이라느니, 타락한 놈이라느니, 온갖 모욕적인 이름으로 저를 부르고, 절더러 당장 꺼지래요……. 마침내 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어요. 은혜로우신 대제후께서는 제가 못마땅하십니까? 그가 답했죠. 네가 어찌 감히 나를 위협하는가. 불쌍하고 멍청한 어린 망종 같으니라고. 저기 문이 있어.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너 같은 쓰레기하고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모차르트는 말 그대로 궁정으로부터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습니다. 엉덩이를 걷어차인 모차르트는 자유 음악가4)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4)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는 궁정에 속박받지 않는 자유 음악가를 꿈꾼 고전 음악가이기도 하다. 1790년대 그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는 듯싶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결실을 맺기도 전에 중단되었다. 음악사에 있어 자유 음악가를 말할 때 베토벤을 최초의 사례로 꼽는 의견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궁정을 벗어난 모차르트는 새로운 음악 시장에 발을 내디디며 귀족이 아니라 시민들의 희로애락을 노래했습니다. 대규모의 관중을 대상으로, 거대한 공연장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시장에서 모차르트는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그의 꿈은 안타깝게도 미완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정에서 탈출해 자유 예술가가 된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의 재주와 작품을 개방된 시장에서 판매하여 생계를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궁정에 소속되어 있던 음악가들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당시 음악 시장은 태동 단계로 입장료를 지불하는 관객을 위한 연주회를 기획하고 악보를 유통하는 출판인들이 막 생겨나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변화를 놓치지 않고 콘서트 홀로 직행했습니다. 그는 궁정에 울려 퍼지는 음악보다 누구나 귀 기울일 수 있는 콘서트 홀에 어울리는 음악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오페라는 모차르트가 이런 맥락에서 선택한 장르였습니다. 귀족들의 사교 파티를 위한 배경 음악에 불과했던 궁정 음악에서 벗어난 그는 콘서트 홀에서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1782년 오페라 <후궁 탈출>로 대성공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786년 <피가로의 결혼>, 1787년 <돈 지오반니>, 1790년 <코시 판 투테> 그리고 마침내 1791년 <마술피리>에 이르기까지 궁정 예술가에서 시민 예술가로 변한 모차르트는 오히려 작곡가로서 전성기에 도달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에는 미래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알아챌 수 있는 궁정의 시대착오를 풍자하는 유머 코드가 담겨 있는가 하면, 여주인공 수잔나는 “모든 여성은 일어서야 해 / 무자비한 남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학대받는 슬픈 여성을 지키기 위해”라는 가사의 아리아를 부르며 여성의 권리를 노래하기도 합니다. 구 질서는 자유 예술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오페라엔 궁정과 귀족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 열리게 될 근대 사회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궁정 음악가로부터 시민 음악가로 변신한 모차르트의 판단은 적절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신민의 시대가 끝나고 시민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모차르트보다 15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은 뒤를 이어 이 시대의 이상을 음악에 담았습니다. 모차르트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베토벤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모차르트가 음악의 천재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신동 모차르트는 성인이 되어 음악의 천재이자 동시에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천재로 변모하였습니다.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천재성과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성의 협주곡이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모차르트를 만들어냈습니다. 제임스 와트5)가 증기 기관을 개선해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시기는 모차르트가 궁정 음악가에서 시민 음악가로 전환하던 때와 일치합니다. 모차르트는 음악가의 방법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했습니다.


5) 제임스 와트(James Watt) : 기존의 증기 기관을 개량해 1776년 증기 기관을 상업화했다. 1783년에는 회전식 증기 기관을 완성해 탄광용 펌프를 넘어 만능동력원으로 각광을 받았다.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과 그 시대정신을 뒷받침한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가 모차르트를 통해 음악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모차르트라는 존재야말로 ‘각 시대는 그 시대에 어울리는 천재를 낳는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노명우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베를린 자유대학교 사회학 박사.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세상 물정의 사회학> 등 다수의 책을 썼다. 최근 TV 강연 등을 통해 사회학에 대한 저변을 넓히는 일에도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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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자처하는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평생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감내한 이유는 귀족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궁정 음악을 벗어난 자유 음악가로의 꿈


베토벤은 궁정악단에 종사하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태생적으로 궁정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혼란과 격동이 혼재하는 격변의 시대에 베토벤은 안정적인 궁정 음악가의 길을 거부하고, 자유 음악가1)의 길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당시 자유 음악가는 감당해야 할 경제적 리스크가 큰 탓에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자유음악가의 길을 시도한 선배 음악가들이 실패했기에 그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교회가 주는 고정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개최하여 이익을 얻는 길을 모색한 비발디2)나 모차르트가 끝내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을 모두가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1)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 비발디가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난 사례라면, 베토벤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로 자유음악가의 꿈을 실현한 고전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2) 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 이탈리아의 작곡자이자 연주자이면서 사제. 오페라 등 새로운 영역을 시도하며 음악 대중화에 힘썼지만,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흥행 요소’가 있는 음악 활동을 금지 당해 가난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것은 그 영광만큼의 커다란 고통과 고난이라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의 길을 택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랑스 혁명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로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군주제 아래서 군주, 귀족이 조직한 악단에서 급여를 받고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 내지 하인으로서의 음악가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모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기 시작한 상태에서 베토벤이 선택한 자유 음악가의 길은 고난이 예정된 미래나 다름없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난청 증세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고독한 운명을 이겨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토벤의 생애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더욱이 1809년이 되자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날로 위세를 떨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침략하면서 음식비가 매년 무려 50%씩이나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3)는 이와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 탄생한 곡입니다. 전쟁을 피해 귀족들 대부분이 빈을 떠났지만 베토벤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남아 창작에 집중했습니다. 자유 음악가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베토벤이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 그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전쟁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큰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악보 출판과 음악회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음악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끝없는 가난, 끊임없는 독립의 꿈


나폴레옹군의 빈 진주 당시 베토벤이 스스로 물가를 기록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은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해르텔’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구두 한 켤레를 30플로린, 코트 한 벌을 60~70플로린에 구입했는데, 1792년에는 6플로린이었던 구두를 1810년에는 30플로린에 구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서술을 보면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가 1792년에서 1810년 사이에 무려 여섯 배나 상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베토벤의 편지에는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1816년 람베르티 백작으로부터 임차한 주택으로 이사했는데, 임차료가 무려 500플로린에서 5,500플로린으로 10배 이상 올랐다.’는 푸념도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이 당시 빈의 피아노 제조업자 난네테 쉬트라이허에게 쓴 편지에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베토벤의 친구이자 악보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4)는 비교적 저렴한 빈 교외로 이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때 베토벤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벽지를 직접 도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4) 토비아스 하슬링거(Tobias Haslinger) : 음악상의 경영자이자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한 출판업자이다. 베토벤은 시외에 살며 빈 시내에 들를 때마다 하슬링거의 상점을 찾아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개인 사교장처럼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음악 도시 빈에서 명성을 얻은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생애 최초로 자신이 기획하여 수익을 갖는 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1800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극장에서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 음악가의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정신과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귀족의 후원에 기대지 않는 자유 음악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지만 악보 출판업의 부흥 등 주변 환경의 변화는 이 같은 베토벤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하고,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6~7개 유명 악보 출판사의 러브 콜을 받는 등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1807년에는 황제의 궁정 악장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전임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받았던 연봉의 두 배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황제 궁정악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작곡해야 하는 작품 중 오페라가 3번 이상 공연될 경우 세 번째 공연부터는 그 수익을 자신이 가져가고, 연 1회 개인적 음악회를 허용해 달라는 파격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물론 이 같은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베토벤이 세계 최고의 궁정악장 자리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고유의 예술 세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황제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자리도 베토벤이 가진 자유 음악가에 대한 꿈을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 혹은 소송


베토벤의 삶은 자유 음악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독립과 예술적 자유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806년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5) 공작이 오스트리아에 진격해 온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베토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토벤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원이 중단되면서 베토벤은 다시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5)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Karl von Lichnowsky) :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 모차르트에 이어 베토벤을 후원했다. 1800년부터 1806년까지 베토벤에게 매해 600플로린을 제공했으며,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걸작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베토벤이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를 알아차린 신생국 베스트팔리아 왕국의 왕이자 나폴레옹의 친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왕국의 수도 카셀의 궁정악장직을 베토벤에게 제의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연금보다 거의 네 배 이상의 거액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토벤을 빈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빈의 음악 애호가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 롭코비츠 공작이 각각 1,800플로린, 1,500플로린, 7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총 4,000플로린이 모였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가 약속한 연봉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기에 베토벤은 빈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사용하면서 통화 수단이던 플로린은 1811년에 가치가 폭락하였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약속받은 연금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루돌프 대공만이 간신히 연금을 지급하였고, 킨스키 공작은 파산 후 사망하였습니다. 롭코비츠 공작도 파산을 선언하며 연금의 지급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1813년 롭코비츠 공작과 1815년 킨스키 공작 가문에 각각 소송을 제기하여 밀린 연금을 받아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소송까지 해서 후원금을 강요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거나 베토벤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마치 6.25전쟁 직후와 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후원이 끊기자 베토벤에게 남은 수익 모델은 악보 출판업자를 통한 악보 판매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당시는 출판사에 작품을 넘기면 일회성으로 뭉칫돈을 받고 이후의 판매 독점권까지 양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과정에서 작품 번호6)를 잘 챙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출판을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잘 관리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인데요. 훗날의 일이지만 베토벤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악보 출판 시 작품 번호를 기준으로 저작권의 혜택을 받고 자유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저작권법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6) 작품 번호(Opus Number) : 오푸스(Opus)는 작품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보통 약자를 써 Op.1, Op.23 등으로 클래식 작품에 번호를 붙인다. 작품 번호는 17세기 후반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며 표지에 기재되기 시작한 방식이다. 베토벤은 스스로 자신의 음악 작품에 번호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로, 그의 사후 발견된 유작에는 ‘WoO. 번호’를 매긴다. ‘WoO.’는 ‘작품 번호 없음(Werks Ohne Opuszahl : Works without Opus number)’ 이라는 뜻이다.


당시 음악가들은 초판에 한해서만 출판업자로부터 판매 수입을 배당받고 재판부터는 배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색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먼저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정식 출판하기 전 6개월에서 12개월 사이의 독점 사용권을 귀족에게 판매했습니다. 사용권이 만료되고 나면 비로소 출판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작품을 여러 번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장엄 미사곡 Op.123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출판을 시도해 작품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먼저 독일 본의 출판업자 니콜라우스 폰 짐록에게 Op.123의 3년 독점 사용권을 판매했고, 친구이자 출판업자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라이프치히의 페터스 출판사,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타리아 출판사, 마인츠의 쇼트(Schott)7) 출판사, 총 네 곳에 3년 후 판매를 조건으로 같은 작품을 재판매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장엄 미사곡의 초판 첫 페이지에 자신의 서명을 쓴 악보를 총 28개 만들어 궁정악단에 판매하고,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10개국의 주문을 받아 추가 수입을 올렸습니다.


7) 쇼트(Shott) : 베토벤과 악보 출판계약을 맺었던 출판사로 1770년 창립해 250여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 출판 기업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는 물론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클래식 거장들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귀족에게는 일정 기간 독점 사용권 비용을 받고, 이후에 다시 다양한 루트의 출판을 모색하고 여기에 초판 사인본의 판매와 해외 판매까지, 베토벤은 단 한 작품으로 수많은 버전을 만들어 재판매하며 상당한 부가 수익을 거둬들였습니다. 음악사상 실질적으로 처음 자유 음악가의 길에 들어선 베토벤은 이처럼 경제적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고, 이러한 노력은 후배 음악가들이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데 훌륭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악보에 번호를 붙이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이것은 더 많은 출판 수익을 거두기 위해 찾아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번호에는 숫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조병선 청주대학교 법학과 교수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법학박사. 사법연수원, 법과대학원 등에서 ‘법과 음악’을 주제로 한 강의를 하고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 진행한 <클래식 법정>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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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하이든의 삶은 고전 음악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평범한 축에 속합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하이든은 평온하다 못해 틀에 박힌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런 하이든이 말년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성공과 건강한 삶을 모두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 나오는 한 문장처럼 나이 듦은 흠이나 약점이 아닙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인생 2막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어줄 것입니다.



젊음에 대한 잘못된 집착부터 버려야


평균 수명이 40세에도 미치지 못했던 1732년에 태어난 하이든은 무려 77세까지 장수하며 천수를 누렸습니다. 30년 가까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에서 일한 끝에 은퇴하고 또 다른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고전 음악가들 가운데 하이든의 삶은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 중∙장년층에게 좀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하이든처럼 은퇴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막연하게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가 문제라고 정확히 말하기 어렵고 증상도 뚜렷하지 않지만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왜 사는가?’, ‘텅 비어 있고 껍데기만 있는 느낌’이라고 호소하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모호한 표현들이야말로 내면에서 오는 목소리입니다.

 



이제껏 앞만 보고 살아오며 자신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내면에서 이젠 스스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후반기에는 그동안 외면했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남의 시선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외적인 면에 집착하곤 합니다. 외모에 대한 집착은 젊음에 대한 집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은퇴 후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젊음에 대한 집착부터 버려야 합니다. 일단 건강과 외모가 예전 같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외모에 집착하고, 아무 근거 없이 건강 음식을 끊임없이 섭취하는 일부터 멈춰야 합니다. 최근에는 도가 지나쳐 성형 수술에 집착하며 젊은 사람과의 외모 경쟁에 힘을 쓰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나이에 맞지 않게 사는 일입니다. 진정한 젊음은 끊임없이 배우며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정신과 삶의 태도에 있는 것이지, 주름 없는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인정하되 우아함과 품위를 지키고, 경험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나이가 든다면 오래된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경험, 연륜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멋진 시니어가 될 것입니다. 흔히 중∙장년층의 어른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을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넘보고 이기려 드는 경쟁자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쟁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선배들의 경험과 지혜를 이어받아 미래를 개척할 사람입니다. 실제로 하이든은 말년에 이르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후배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기꺼이 자신의 무대를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오페라 대신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상연하라고 권유한 적도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가난한 후배 음악가를 위해 자신의 작품집에 지면을 내어주고 곡을 실어주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의 제자와 저작권 소송이 생겼을 때 법정에 출두해 작품의 주인은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그에게 곡을 헌정하고 말년에는 그의 후배들이 하이든의 곡으로 공연을 할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죽는 날까지 곡을 쓰고 공연을 했지만, 한 번도 젊은 음악가들을 자신과 경쟁하는 라이벌로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젊은 음악가들의 활동을 더 많이 도울수록 더 많은 이가 하이든의 음악을 연주하고 그의 음악을 더 널리 퍼트렸습니다. 하이든이 죽는 날까지 많은 이에게 큰 인물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일과 가족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의 삶을 찾아서


50대야말로 ‘진정한 나’의 삶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자녀들도 성장해 양육과 교육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과 가족을 떠나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누려본 적이 없기에 까닭 모를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모의 의견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가족 문화의 특성상 한국인은 부모가 정해준 길을 따르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는 스무 살 성인이 되어도 결혼 전까지는 자립을 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직장을 잡고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독립해도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느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신은 일을 그만두고 자녀들은 독립하는 시점이 됩니다. 은퇴한 분들의 사정은 엇비슷합니다. 일과 가정만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세상은 아주 낯선 곳입니다. 젊은 날의 대부분을 궁정악장으로 살아온 하이든도 은퇴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중∙장년층 가운데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하이든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삶은 누군가의 자식으로, 부모로, 배우자로 살아온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은퇴한 이후 하이든도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외국어도 못 하고, 해외여행을 해본 적도 없고, 음악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하지만 하이든의 놀라운 점은 낯설고 새로운 경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음악을 고집하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습니다. 말년에야 비로소 경험한 생애 최초의 영국 여행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흔히 50대 이후 일과 가족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서 오롯이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시간을 써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은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이제부터는 조금이나마 진정으로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시간의 일부, 내가 가진 돈의 일부를 써서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자극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감각이나 운동의 즐거움을 느껴보길 권합니다. 감각과 운동은 인간의 원초적인 기능이지만 이 즐거움은 매우 큰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귀가 즐겁고, 좋은 그림을 보면 눈이 즐거우며, 좋은 음식을 먹으면 입과 코가 즐겁습니다. 산책∙등산∙운동∙춤과 같은 활동을 통한 즐거움 또한 큰 기쁨을 줍니다. 세 번째로 지적인 활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어보라고 권합니다.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자료를 찾고 관련된 정보를 뇌에 입력하고 응용하는 것 또한 즐거운 일입니다. 어느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점점 많이 알게 되면 그 분야에서만큼은 고수가 됩니다. 요즘 말로 ‘덕후’가 되는 것이지요. 덕후가 되면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고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의 친교도 늘어나는 즐거움이 덤으로 생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밀, 몰입에서 찾다


스무 살이 넘어 하이든은 켈러라는 가발 제조업자의 둘째 딸 테레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테레제는 결국 수녀가 되어 하이든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테레제가 수녀원으로 간 뒤에도 그는 켈러가(家)를 드나들었는데요. 테레제의 언니 마리아와 28세 때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이든의 아내인 마리아 안나 켈러1)는 하이든보다 세 살 연상에 음악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이든의 악보를 그릇 받침이나 과자 포장지로 쓰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마는 컬페이퍼로도 썼다고 합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하이든이 음악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겠지만, 하이든을 음악에 몰입하게 만드는 한 가지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1)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 : 하이든의 아내. 1760년부터 40여 년을 하이든의 아내로 살았지만 슬하에 자식은 없다. 음악적 소양이 전혀 없고 호전적 성격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마리아는 유명인의 악처 리스트에 빠짐없이 오를 만큼 평판이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서로 맞지 않는 배우자를 만난 하이든과 마리아 모두 외롭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하이든은 성실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호기심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음악을 듣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작곡에 몰입해 즐거워했고 발전해가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너무 좋아서 깊이 빠지게 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때 우리는 흔히 ‘삼매경’에 빠졌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경험을 플로(Flow)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몰입’이라고 해석합니다. 플로의 원뜻은 ‘물의 흐름’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한번 흐름을 타면 역으로 거스르기가 어렵죠. 그래서 정말 좋은 것을 만나게 되면 헤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쭉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몰입을 뜻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2)에 의하면 이런 ‘몰입’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었거나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갑자기 몰입하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년의 하이든은 영국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3)를 처음 듣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고 하는데요. 그 음악에 매료돼 그날부터 <천지창조4)>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는 하이든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의 생전 마지막 생일날 공연된 것도 바로 이 곡입니다.


2)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 미국의 심리학자로서 ‘긍정심리학’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이다. 창의성과 관련된 몰입(Flow)의 개념은 많은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으며 현재는 미국 내 ‘삶의 질 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3) 오라토리오(Oratorio) : 17~18세기에 가장 성행했던 대규모의 종교적 극음악. 성서에 입각한 종교적인 내용을 지녔으며 동작이나 무대 장치 없이 합창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4) <천지창조> : 하이든이 3년에 걸쳐 완성한 오라토리오로 하이든의 대표작이다. 1798년 4월 초연한 이후 빈과 런던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회자되는 걸작으로 자리 잡았으며, 당시의 음악가를 비롯한 대중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7일간의 천지창조 서사에 곡을 붙인 것으로 창세기, 시편을 비롯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에서 가사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하이든은 음악에 몰입함으로써 괴로움을 잊었다고 하는데요. 말년에도 음악에 몰입해 충만한 삶을 누렸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지 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신동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서울의대, 서울대 외래 교수,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지음오페라단 이사, KBS 팟캐스트 <힐러들의 수다>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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