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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문요한의 인간관계 심리학 2편

‘관심과 간섭은 다른 거야’



30대 후반의 K는 지방도시의 대학교수이다. 시간강사를 떠돌다가 작년에 어렵게 임용되었지만, 지금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아니, 어떨 때는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을 정도다. 바로 인간관계 때문이다. 왜 대한민국에는 남의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몇몇 교수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방을 찾아온다. 마실 것을 갖다 주거나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까진 좋지만 대화는 늘 사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방 불편해지고 에너지를 빼앗기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 같아서는 ‘제발 저에게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제는 방 안에 있으면서도 ‘외출중’이라는 푯말을 걸어놓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퇴근한 후에는 어떨까. K교수 부부는 다른 부부들과 달리 공유하는 게 별로 없다. 경제 관리나 취미 생활도 각자 할 뿐만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으로 정해놓은 잠자리 외에는 잠도 각자 방에서 잔다. 각자 나름대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공허감이 깊어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관계’를 지니고 산다

 


사람은 누군가와 하나가 되려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K교수는 상대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누군가와 하나가 되려는 욕구에 무관심한 걸까요? 아닙니다. 무관심한 게 아니라 방어적일 뿐입니다. 


K교수에게 누군가 다가오는 것은 '관심'이 아닌 '간섭'으로 느껴지고, 가까운 인간관계란 ‘친밀함’이 아닌 ‘위협’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자신의 약한 자아가 무너지거나 상대에게 휘둘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사연이 있습니다.


그녀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어린 딸을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항상 전화기 옆에 붙어 지내게 하며 수시로 일과를 확인했죠.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통근시간을 지켜야 했고 남들 다 가는 MT도 갈 수 없었습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지요. 딸을 위한다는 이유였지만, 엄마의 관심은 그녀에겐 구속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그녀가 어머니로부터 합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해서가 아니라 독립을 위해 한 결혼은 그녀에게 또 다른 구속일 따름이었습니다. 



관심과 간섭의 차이 


K교수에게 관심과 간섭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이 요청하지 않았는데 다가오거나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다가오면 모두 ‘간섭’이며 ‘오지랖’이라고 느낍니다. 상대방의 의도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죠. 물론 상대방이 아무리 관심을 갖고 다가오더라도 내가 간섭받는다고 느낀다면 의미 없겠지만, ‘내 마음에 들면 관심, 내 마음에 안 들면 간섭’으로 선을 긋는 것도 문제입니다.

 



관심과 간섭은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 여부'와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려는 개입 여부’로 구분됩니다.


관심은 연민, 호감, 호기심이라는 감정의 토대 위에서 비롯되는, 대상에 대한 판단 이전의 이끌림입니다. 그렇지만 간섭은 감정보다는 이성의 토대 위에서 비롯되는 대상에 대한 판단적인 개입입니다. 


예를 들어, 주변의 부부가 아이를 안 낳고 두 사람끼리 살기로 했다고 해봅시다. 이때 그들이 왜 그렇게 살기로 했는지 궁금함을 느끼고 알고 싶은 것은 관심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라는 잣대로 두 사람에게 개입하는 건 간섭입니다. 두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기도 전에 “나중에 외로워서 어떻게 살려고 해!”라고 때 이른 조언을 하거나, 심지어 “두 사람 다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라고 비난한다면 전형적인 간섭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의 목적은 상대방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고 함께 하는 데 있지만, 간섭의 목적은 상대방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문제는 상대방의 변화를 바라는 간섭이 정작 긍정적인 반응 대신 더 큰 반발과 갈등만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려는 자율성의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관계는 개별성을 지켜준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탄생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왜 인간관계가 갈등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초의 인간 아담은 에덴동산 안에서 점점 쓸쓸함과 권태를 느낍니다. 다른 동물들은 짝이 있는데, 그만 혼자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물주는 아담이 잠든 사이에 그의 갈비뼈를 꺼내어 이브를 만듭니다. 즉,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있어 최초의 타인인 이브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아담의 일부인 셈입니다. 이는 인간이 타인을 자신의 일부처럼 바라보는 근원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잃어버린 일부를 되찾아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합일의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상대가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느끼길 바랍니다. 하지만 양육의 핵심은 자녀의 독립이며, 우정의 지속은 차이의 존중에 있는 것처럼, 사랑 역시 각자를 인정하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합일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나와 너를 넘어선 ‘우리’를 만들어가는 '공유의 관계'입니다. 둘이 만나 셋이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공자는 건강한 인간관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논어』 '자로' 편 -


이는 ‘군자는 화합하되 남들에게 같아지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아지려고 하지만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건강한 관계를 바란다면 우리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합일의 욕구를 포기하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되 공통된 영역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차이를 존중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니 신경 쓰거나 간섭하지 말고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흔히 '쿨한 관계'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합일의 관계만큼이나 역기능적인 관계양상입니다. 서로를 이어주는 '우리'가 부재한 무늬만 관계일 뿐입니다.  


 

자아와 관계의 균형을 위하여 



관심과 간섭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잔소리 하는 엄마처럼 인간관계에서 관심과 간섭은 늘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그 양면을 다 볼 줄 알고 이를 적절히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채근담에 보면 '해미불함(海味不醎)'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해산물은 바닷물에 살지만 먹어도 짜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필요한 만큼만 염분을 받아들이고 해로울 수 있는 나머지 양은 다시 내보낼 수 있는 능동적인 세포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바닷물의 짠 소금처럼 사람들의 관심이나 간섭은 넘쳐납니다. 그렇다고 마냥 받아들이거나 마냥 차단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수위조절과 자기표현의 방법을 꾸준히 익혀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흘려보내며, 지나친 관심과 개입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요구를 표현함으로써 경계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상황이나 사람마다 다르기에 그 적정선을 잡는다는 것은 늘 어렵습니다. 균형을 잡았다 싶다가도 금방 흔들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두발자전거를 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균형을 잃은 것 같으면 반대로 핸들을 틀어주어 다시 균형을 잡아가는 것처럼 자아와 관계의 균형 역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다시 회복해나가는 끝이 없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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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만발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남들의 시선이 따갑다면 당당하게 표현하기 쉽지 않은데요. 하물며 내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오늘도 좋은 영화 한 편과 함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시내를 걷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점심시간 거리를 점령한 직장인 부대, 시민단체에서 회원을 모집하는 활동가들, 아이와 나들이 나온 엄마들... 때로는 개인 혹은 단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자주 눈에 띕니다. 고개가 끄덕여질 때도 있고 내 생각에 바빠 모른 척 지나갈 때도 있죠. 황당한 구호에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며 누구나 나름의 견해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주장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만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자유와 인권, 나아가 사랑의 문제는 참 어렵습니다.


  20대의 나이에 세계적인 감독이 된 자비에 돌란은 2013년 <로렌스 애니웨이>라는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어 교사인 로렌스는 약혼녀 프레드와 함께 살며 아기자기한 사랑을 키워갑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오죠. 로렌스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남자친구의 생일맞이 여행을 계획했던 프레드는 로렌스의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로렌스는 단지 ‘내가 잘못된 몸을 타고 난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프레드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진짜의 나를 찾겠다는 애인 앞에서 ‘그렇다면 나와의 관계 역시 가짜였냐’라고 되묻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근육과 남성성이 그토록 어색하고 싫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죠. 혼란에 빠진 프레드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프레드가 로렌스와 함께 하기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로렌스와 프레드의 지독한 사랑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줍니다. ‘사랑만이 유일한 치유의 길’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셈이죠. 어린 시절부터 성정체성에 대해 홀로 고민하던 로렌스는 더 이상 외로운 채로 견딜 필요가 없습니다. 여장을 하고 사회에 나서는 과정에서 힘을 주는 약혼녀가 있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프레드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또 다른 힘을 키워갑니다. 그 과정은 물론 험난합니다. 나도 소화시키지 못한 현실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고 항변해야 하는 프레드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된 그녀는 회사에서 잘리고, 동시에 로렌스 역시 학교에서 사직권고를 받으면서 그들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듭니다. 토요일 아침, 동네 식당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식사를 합니다. 주변의 시선이 클로즈업되고 불편한 가운데 괜찮은 척 말을 꺼내는 로렌스와 절망감에 휩싸인 프레드. 예의 없는 식당 주인의 질문공세에 프레드는 폭발합니다. ‘당신이 나처럼 살아봤어?’라며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질문도 할 자격이 없다고 윽박지르죠. 대체 누가 예의가 없는 것인지, 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지... 그녀는 매우 공격적으로 소리치고 있지만, 이미 그보다 더 큰 폭력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일까요?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일 뿐이라면 대체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틀렸어!’라는 생각이 호기심을 가장한 조롱과 폭력에 힘을 실어준 것은 아닐까요?


  영화 속 로렌스가 갖고 있는 문제를 정신장애 진단으로 분류할 때 ‘성불편증(Gender dysphoria)’에 속합니다. 성정체성과 관련된 정신의학적 관점은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동성애는 이미 오래 전(1968년)에 진단분류에서 빠졌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성적 지향 및 성 결정에 대한 자유를 지지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정체성 장애’라고 불리던 것이 최근 ‘성불편증’이라는 이름으로 순화된 것도, 성 결정 그 자체를 질환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성불편증에 속하는 이들은 잘못된 성으로 태어났다고 느끼며 고통을 겪습니다. 이를 치료하는 최종적인 방법은 성전환수술이지만 더불어 사회생활에서 찾아오는 우울 및 불안 증상에 대해서는 심리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병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죠. 로렌스와 프레드는 모두 이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인 관습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어쩌면 프레드가 식당에서 화를 낸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녀가 속 시원히 부당함을 호소했을 때,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죄의식에서 놓여나 당당히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상담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상담자도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상담자는 그들이 어떤 두려움으로 인해 꽁꽁 숨겨둔 그들 자신을 안전한 공간에서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 잘잘못을 가리거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죠. 가족도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어쨌거나, 그의 존재 자체를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더불어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국 로렌스와 프레드는 헤어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나지만 이전처럼 하나가 되지는 못합니다. 마지막에 ‘그 시절 이미, 내 고백이 아니었어도 우리 관계는 위기였다’고 말하는 로렌스의 대사는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이 유일한 치유의 길’인 것만 같았던 영화 속 장면들은 ‘사랑은 환상일 뿐이다’라며 쓴 소리를 던지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보다는 서로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만큼 참으로 고귀한 일임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10년 동안 사랑했던 로렌스와 프레드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간다 해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와 너,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 해도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힘이 사회 전반에 퍼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