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꾸밈 요소

화제만발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남들의 시선이 따갑다면 당당하게 표현하기 쉽지 않은데요. 하물며 내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오늘도 좋은 영화 한 편과 함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시내를 걷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점심시간 거리를 점령한 직장인 부대, 시민단체에서 회원을 모집하는 활동가들, 아이와 나들이 나온 엄마들... 때로는 개인 혹은 단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자주 눈에 띕니다. 고개가 끄덕여질 때도 있고 내 생각에 바빠 모른 척 지나갈 때도 있죠. 황당한 구호에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며 누구나 나름의 견해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주장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만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자유와 인권, 나아가 사랑의 문제는 참 어렵습니다.


  20대의 나이에 세계적인 감독이 된 자비에 돌란은 2013년 <로렌스 애니웨이>라는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어 교사인 로렌스는 약혼녀 프레드와 함께 살며 아기자기한 사랑을 키워갑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오죠. 로렌스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남자친구의 생일맞이 여행을 계획했던 프레드는 로렌스의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로렌스는 단지 ‘내가 잘못된 몸을 타고 난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프레드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진짜의 나를 찾겠다는 애인 앞에서 ‘그렇다면 나와의 관계 역시 가짜였냐’라고 되묻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근육과 남성성이 그토록 어색하고 싫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죠. 혼란에 빠진 프레드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프레드가 로렌스와 함께 하기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로렌스와 프레드의 지독한 사랑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줍니다. ‘사랑만이 유일한 치유의 길’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셈이죠. 어린 시절부터 성정체성에 대해 홀로 고민하던 로렌스는 더 이상 외로운 채로 견딜 필요가 없습니다. 여장을 하고 사회에 나서는 과정에서 힘을 주는 약혼녀가 있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프레드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또 다른 힘을 키워갑니다. 그 과정은 물론 험난합니다. 나도 소화시키지 못한 현실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고 항변해야 하는 프레드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된 그녀는 회사에서 잘리고, 동시에 로렌스 역시 학교에서 사직권고를 받으면서 그들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듭니다. 토요일 아침, 동네 식당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식사를 합니다. 주변의 시선이 클로즈업되고 불편한 가운데 괜찮은 척 말을 꺼내는 로렌스와 절망감에 휩싸인 프레드. 예의 없는 식당 주인의 질문공세에 프레드는 폭발합니다. ‘당신이 나처럼 살아봤어?’라며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질문도 할 자격이 없다고 윽박지르죠. 대체 누가 예의가 없는 것인지, 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지... 그녀는 매우 공격적으로 소리치고 있지만, 이미 그보다 더 큰 폭력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일까요?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일 뿐이라면 대체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틀렸어!’라는 생각이 호기심을 가장한 조롱과 폭력에 힘을 실어준 것은 아닐까요?


  영화 속 로렌스가 갖고 있는 문제를 정신장애 진단으로 분류할 때 ‘성불편증(Gender dysphoria)’에 속합니다. 성정체성과 관련된 정신의학적 관점은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동성애는 이미 오래 전(1968년)에 진단분류에서 빠졌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성적 지향 및 성 결정에 대한 자유를 지지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정체성 장애’라고 불리던 것이 최근 ‘성불편증’이라는 이름으로 순화된 것도, 성 결정 그 자체를 질환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성불편증에 속하는 이들은 잘못된 성으로 태어났다고 느끼며 고통을 겪습니다. 이를 치료하는 최종적인 방법은 성전환수술이지만 더불어 사회생활에서 찾아오는 우울 및 불안 증상에 대해서는 심리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병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죠. 로렌스와 프레드는 모두 이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인 관습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어쩌면 프레드가 식당에서 화를 낸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녀가 속 시원히 부당함을 호소했을 때,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죄의식에서 놓여나 당당히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상담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상담자도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상담자는 그들이 어떤 두려움으로 인해 꽁꽁 숨겨둔 그들 자신을 안전한 공간에서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 잘잘못을 가리거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죠. 가족도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어쨌거나, 그의 존재 자체를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더불어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국 로렌스와 프레드는 헤어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나지만 이전처럼 하나가 되지는 못합니다. 마지막에 ‘그 시절 이미, 내 고백이 아니었어도 우리 관계는 위기였다’고 말하는 로렌스의 대사는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이 유일한 치유의 길’인 것만 같았던 영화 속 장면들은 ‘사랑은 환상일 뿐이다’라며 쓴 소리를 던지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보다는 서로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만큼 참으로 고귀한 일임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10년 동안 사랑했던 로렌스와 프레드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간다 해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와 너,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 해도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힘이 사회 전반에 퍼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








화제만발 가족 여러분~ 

하루하루 참고 이겨내야 하는 일들이 참 많죠? 그러나 가끔은 이렇게 묵묵히 버티는 것이 맞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난 연말 종영된 드라마, <미생>은 직장인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극 중,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란 대사 기억하시나요? 삶의 긴 여정에서 그저 버티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죠. 그러나 실은 '그저 버틴다'고 표현하기엔, 그 과정이 매우 치열해서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버티는 데는 굉장한 힘이 필요하며, 역으로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될 수 밖에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도 유명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버티기'의 과정을 현실감있게 보여 줍니다. 우울증 치료 후 복직을 준비하고 있던 산드라는 갑작스런 동료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회사가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를 두고 투표를 했고 절반 이상의 직원이 보너스를 선택했다는 내용이었죠. 하루 아침에 실직하게 된 그녀는 절망에 빠져 무기력해집니다. 그러나 그녀를 달래는 남편과 친한 동료의 도움으로 재투표를 추진하고, 직원들을 만나 설득에 나섭니다. 우울증 치료가 끝나가던 그녀는 다시금 많은 약을 복용하게 되고 여러 번 좌절하지만, 위기의 순간을 넘겨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우울증은 감기와도 같다'는 말은 이제 상식이 되었죠. 여전히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을 꺼려하는 분위기이지만 우울증에 대한 인식은 많이 변하였습니다. 우울증에 약물복용과 더불어 가장 널리 쓰이는 

치료법은 '인지치료'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 때문에 우울하거나 불안한 것 같지만, 문제는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근길에 만난 상사가 인사를 받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순간 불안했다면, '내가 뭘 잘못했나?'란 생각이 스쳤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울해졌다면 '내가 늘 그렇지.. 난 못난 인간이야'란 생각이 포함되었을 수 있죠. 만일, '상사가 날 못 봤나 보다'라고 해석했다면, 불안하거나 우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지치료에서는 이렇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부정적인 신념'들을 찾아내고 수정하기 위한 다양한 기법을 사용합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주인공 '산드라'는 여러 번 위기에 처합니다. 첫 번째로 사장을 만나 "과반수의 직원들이 보너스를 선택했다"란 말을 직접 들은 그녀는 크게 실망합니다. "난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야!"라며 울먹이는 그녀를 붙잡고 '마누'(남편)는 이야기하죠. "당신 여기 있잖아! 사랑해." 이 장면에서 산드라의 부정적인 신념은 성급한 일반화와 독심술의 오류에서 비롯됩니다. 과반수의 직원들이 보너스를 선택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녀의 사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이전에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산드라를 위험한 상상에서 현재로 불러들인 마누는 재투표 전에 모든 동료를 한 명씩 만나 보도록 권합니다. 

 


  한 명 한 명의 동료를 만나는 장면들이 모두 인상적입니다. 쉽게 거절하는 사람이나 오랫동안 고민하는 친구나 하나같이 돌아서는 그녀를 불러 세웁니다. '미안해','너를 선택할게','다시 찾아와 줘' 혹은 '그렇다고 널 뽑을 것 같아?'라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그대로 보내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산드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부모 자식 간, 부부 간의 다툼을 목격한 산드라는 집에 돌아와 남은 약을 모두 삼키고 자리에 눕죠. 또다시 그녀의 자동적 신념이 작동합니다. '나는 가정 불화의 원인 된 쓸모없는 인간이야.', '내가 죽는 게 여러 사람을 위한 일이야'. 죽을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한 것은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남편의 강요로 보너스를 선택하기로 한 '안느'가 집을 나와 그녀의 싸움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마누와 안느가 전하는 희망 앞에서 그녀의 절망은 힘을 잃습니다. 병원에서 응급 처치로 목숨을 구한 산드라는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저 곁에 있어 주는 남편에게 꼭 안깁니다. 자기를 진심으로 아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는 치료의 시점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복직은 좌절됐지만, 많은 동료들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상대를 공감하게 되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집니다. 영화의 후반부, 계약직 직원을 자르고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사장의 말에 당당하게 거절하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마누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라며 웃는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생기 넘치고 행복해 보입니다. 산드라의 힘겨운 여정은 자동적 신념을 수정하고 인지적인 개입을 통해 우울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치료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산드라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마누의 강인함과 스스로의 선택을 책임지려는 안느의 용기는 큰 몫을 합니다. 더불어 각자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픔을 공감한 동료들의 반응은 산드라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동기가 됩니다.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신가요?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땐 잠시 멈춰 심호흡하고 '나의 어떤 생각이 현재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살펴보세요. 우선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온 그 순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때의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떠올려야 합니다. 나의 진심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여유를 찾고 객관적인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중요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혼자서 무작정 버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할 수 있을 때 변화와 성장이 따라옵니다. 심리상담에서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하는 것처럼 말이죠.




화제만발 가족 여러분~ 올 한해 어떻게 보내셨나요? 

이번 주 생활 속 심리학 이야기, '후회하지 않아'를 통해 한 해를 되돌아 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져 보세요! 

 

  2014년도 여지없이 저물어 갑니다. 돌아보면, 괜스레 애쓰며 힘을 뺀 적도 있었고 그저 담담히 걷다 보니 훌쩍 계절을 지나쳐버린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너그럽게 품으며, '그래 애썼다. 내년에도 화이팅!'...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어떤 날은 어느 한 장면에 꽂혀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대개는 현재의 불만으로 인해 과거를 왜곡시켜 바라보기도 하지만, 과거의 고통이 고스란히 이어져 후회와 자책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면, 일단 멈추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2007년 겨울, 시내의 작은 극장에서 <라 비 앙 로즈>란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다지 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 스크린 곳곳에 숨은 온기를 찾느라 분주했던 것 같고, 그 덕인지 영화의 후반부에는 몸과 마음이 뜨거워졌었죠. 겨울만 되면 이 영화가 그리운 이유입니다. '장밋빛 인생'을 뜻하는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의 원제는 <La Mome>로, 프랑스의 가수 '에디트 삐아프(Edith Piaf)'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어린 소녀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와 사창가에서 지내던 시절, 서커스 단을 나온 아버지와 거리를 헤매며 노래로 푼돈을 벌고, 술과 약물에 취한 나날들. 행운을 잡았다가 곧 놓쳐 버리는 안타까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참담한 기분마저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노래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그녀는, 그녀의 열정과 슬픔을 우리는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교차 편집을 통해 에디트 삐아프의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누더기 옷차림에 방치된 소녀 에디트와 가수로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그녀를,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가수 에디트와 죽음을 앞 둔 외로운 그녀의 모습을 나란히 배치하여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듭니다. 이같은 영화적 기법을 통해 어쩌면 우리는, 슬픔에도 기쁨에도 충분히 머무를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간접 체험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노래 뿐이었는지요. 

 

  자기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유아는 취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대상(selfobject)'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아이의 행동을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반영해주고, 이상화된 가치를 제시하며 발달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상을 말합니다. 성가신 물건처럼 이 곳 저 곳에 맡겨졌던 에디트는 누구 하나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여 주는 이 없이, '자기대상'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한 채 어른이 됩니다. 그녀가 유일하게 관심을 받는 일은 노래를 하는 것뿐이었죠. 훗날 인터뷰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노래하지 않는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무대 위에 올라 조명이 켜질 때의 짜릿함은 그녀가 아기일 때부터 그토록 원하던, 그러나 한 번도 온전히 주어지지 않았던 누군가의 '관심'이었을 것입니다. 관객들의 시선에서 희망을 찾은 그녀는 무대 위의 커튼이 닫히는 그 순간부터 공허함을 견딜 수 없어 술과 약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평소 성공이나 성취에 대한 압박이 큰 사람은, 이와 비슷한 구조일 수 있습니다. 칭찬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결과물을 끊임없이 내야하고, 그렇지 못할 때 심한 무력감에 빠집니다. 스스로 만족하거나 위로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확인을 받고 싶어 합니다. 소수의 부정적 평가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다면, 술이나 쇼핑, 관계 등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다면 내 안에 상처받아 웅크리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말을 걸어 보세요. '누군가가 필요했던 그 시절, 너 참 많이 외로웠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죽기 직전의 에디트 삐아프는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아이가 있었다고 말이죠. '마르셀'이라는 아이의 이름을 외치며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거리에서, 술집에서 방탕하게 살던 젊은 시절, 그녀는 여자 아이를 낳습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보았던 어린 소녀 에디트처럼 작고 귀여운, 어딘가 슬픔에 잠긴 듯한 아이, '마르셀'은 뇌수막염으로 죽게 됩니다. 제대로 먹이지도 보호해주지도 못했던 아이에 대한 감정은 이후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이름 역시 '마르셀'이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닐지 모르죠. 에디트의 죄책감과 후회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한 자신을 버리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딸을 버렸으며, 사랑하는 사람도 지키지 못했다(애인이었던 마르셀은 에디트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로 사망합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은 아닙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것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도, 비행기 사고를 막을 수 없었던 것 모두가 그녀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내가 그런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란 생각을 깔고 있습니다. 나아가 내가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며 자책합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선택은 내가 하지만, 그에 대한 결과까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또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면 된다'란 구호는 자칫 세상 모든 일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키워, 좌절의 상황에서 심한 우울감에 빠질 수 있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된다'에 꽂혀 하는 것 자체를 미루기보다는 '그냥 한다'가 낫습니다. 또 때론 환경을 탓할 수도 있어야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가난, 폭력 등의 사회 문제를 개인의 과실로 돌리는 것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억압된 억울함과 외로움을 심어 주어 우울증의 발병률을 높이는 지도 모릅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에디트 삐아프는 말년에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란 곡을 노래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곡을 온 몸으로 연주하는 그녀는 비로소 과거와 화해하고 상실을 애도하는, 성숙한 어른으로 등장합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탓은 아닙니다. 그러니 더 이상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시간,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혹 진심을 다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참 많이 애썼다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또다시 길을 가보자고 말입니다. 


[생활 속 심리학 이야기] 17편. 음악이 주는 위로




화제만발 가족 여러분안녕하세요?

살다 보면 화가 나고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 때,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될 때 감정을 속으로 삭히는 분들 있으시죠? 하지만 정말 그런 순간에 감정을 누르고 참아야만 할까요?

이번 생활 속 심리학 이야기, '화내고 울어도 괜찮을까?' 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 나눠볼게요^^



  어릴 적, '손이 차면 마음이 따뜻하다'란 말이 유행처럼 번졌던 기억이 납니다. 확인한답시고 친구 손을 잡아 보기도 하고 얼음장 같은 손이 닿은 것이 미안해 '난 마음이 따뜻한 여자야!'라며 으스대기도 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소문의 근원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전하려고 그의 손을 잡았는데 내 손이 너무 차가워 냉기를 전하게 되었을 때의 민망함을 덜기 위한, 이 냉기와 내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이가 지어낸, 깜찍한 소문이 아니었을까요?





  내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쑥스러워서, 불안해서, 혹은 자존심이 상해서 등등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하는 것은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쌓인 여러 감정들을 거둬 내야 하는, 고단한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감정 자체를 꽁꽁 숨겨 버립니다. 그리고 이성의 힘을 빌어, 이 순간 '해야 하는 것', '느껴야 하는 것'을 찾아내려 애를 쓰죠. 최근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서도 주인공 장그래는 화가 날 법 한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고, 마땅히 거절해야할 일에도 그저 '네'하고 받아들이는 신입사원으로, 정 많은 김대리에게 핀잔을 듣습니다. '대체 너는 누구냐?'라는 김대리의 대사는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해야하는 이유를 알려 줍니다. 

 

  2011년 개봉작,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지석(현빈 분) 역시 감정 차단의 일인자로 불릴 만한 인물입니다. 5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로 한 채 이제 막 이별하려는 남녀의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심하게 지루하다 싶기도, 때론 좀 화가 날 정도로 답답하기도 합니다. 첫 장면은 지석이 아내 영신(임수정 분)을 공항에 바래다 주는 차 안에서 시작됩니다. 운전 중인 남자와 조수석에 앉은 여자. 부부의 대화는 질문마다 번호라도 붙인 것처럼 어색한 가운데 막힘 없이 흘러 갑니다. 출장 갔다 오면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의 폭탄발언도, 다른 사람이 있냐고 묻는 남편의 질문에도 감정이 묻어 나지 않죠. 그리고 돌아와 종일 비가 내리는 일요일. 여자는 짐을 정리하고, 남자는 그녀를 돕습니다. 영화 속 배경은 연극의 소품처럼 클로즈업 되고, 소소한 자극 사이사이 긴 여백을 견디는 동안 두 남녀의 감정은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어쩌면 감독은, 감정을 차단해버린 지석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은 감정을 추측하며 미안해 하고 아쉬워하는 영신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한 지를 관객 스스로 느껴 보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적을 뚫고, 드디어 '내게 왜 화를 내지 않느냐'며 소리치는 영신에게 지석이 말합니다. '화를 낸다고 해서 너의 결정이 바뀔 것 같지 않아... 네가 그런 결정을 한 데에는 내 잘못이 있겠지' 감정을 차단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첫째, 화를 내도, 슬퍼 해도 바뀔 것은 없다는 무력감에서. 그리고 내 탓으로 돌리지 않을 때 오는 더 큰 좌절감과 비참함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도 '화내고 슬퍼해도 소용없다'란 생각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며 상담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괜찮다'는 말이, 익숙한 상태를 깨고 싶지 않아 자신과 상대의 입을 막는 수단이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질척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싸울 만한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야말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때가 아닌지 나를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탓하는 마음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정의 불화가 나의 탓으로 돌아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인지, 최근 어떤 계기로 심하게 위축된 것은 아닌지, 상대가 더 큰 상처를 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인지... 

 

  결국, 지석은 매운 양파 덕분에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됩니다. 닦고 또 닦아도 그치지 않는 눈물은 그를 다그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제발 흐르게 해 달라고 말이죠. 우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눈물이 말하는 언어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좌절된 욕구를 찾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화를 내지르는 것과 화를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화'에는 서운함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화'는 후회와 슬픔의 감정일 수 있습니다.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휘몰아 칠 때 우리는 때로 격한 반응을 하기도 하고 잠시 물러서기도 하겠지만, 어느 순간 진심에 가까운 언어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지지고 볶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관계는 더욱 더 끈끈해지고, 때론 깔끔히 정리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한, 서로를 위한 싸움입니다. 

 


  당신의 손이 차갑다고 해서 마음마저 차가운 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화를 낸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차가운 손의 냉기가 옮을까 두려워 내 손을 피하는 것보다는, 서로의 손을 오랫동안 꼭 잡고 따뜻해지길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 과정이 때로 힘겹고 지루하다 할 지라도 서로의 온기가, 진심이 전해질 수 있는 그 시간을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화를 내도, 울어도 괜찮습니다. 자, 이제 울 준비가 되었나요?

 

[생활 속 심리학 이야기] 17편. 음악이 주는 위로

[생활 속 심리학 이야기] 16편. 가족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