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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18세기 들어 후원자인 귀족과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 사이의 갈등이 빈번해졌습니다. 베토벤은 이 같은 시대적 흐름에 주목했습니다. 이를 자신의 음악적 자양분으로 삼아 당시로써는 보다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음악적 형식을 연구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음악적 자양분으로 삼은 베토벤

 


베토벤이 음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 대부분 음악가의 목표는 귀족이 운영하는 궁정악단에 취직하거나 재력 있는 귀족 후원자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르네상스 때부터 시작된 귀족이나 재력가들의 문예 후원, 즉 메세나1)에 의존해 음악시장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같은 후원은 학문과 예술의 애호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는 자기의 얼굴을 역사적 장면 가운데 넣는다거나, 심지어 하느님의 도상을 적용시켜 자신을 신격화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음악계에서도 음악가가 후원자에게 곡을 헌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작권을 후원자가 소유하거나, 음악가의 명성을 빌려 후원자의 사회적 평판, 인지도를 높이는 데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1) 메세나(Mécénat) : 귀족이나 재력가들의 문예 후원을 뜻하는 프랑스어. 고대 로마의 정치가, 외교관, 시인인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Gaius Clinius Maecenas)의 프랑스식 발음에서 비롯됐다. 가이우스 마에케나스는 당대 예술가들과의 교류와 후원으로 그들의 예술적 재능이 후원자들의 권력 강화에 쓰이도록 한 인물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예술 후원이라는 본래의 목적과 상관없이 주문이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간섭이 심해지면서 예술가의 자율성이 침해받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 모습은 베토벤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됩니다.


1802년 초,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하던 친구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2)가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소나타를 작곡해 달라고 청탁하자 베토벤은 몹시 화를 내며 거절했습니다. 왕권을 타파할 것으로 기대했던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의 자리에 오르면서 나폴레옹에게 걸었던 기대가 환멸로 뒤바뀌었기 때문인데요. 1806년 여름에도 베토벤은 자신의 후원자인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프랑스 장교들을 위해 연주하라고 하자 이를 거절하고 빈으로 돌아가 리히노프스키의 흉상을 내동댕이쳤다고 합니다.


2)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Franz Anton Hoffmeister): 세계적 음악 출판사인 '페터스(C. F. Peters)'사의 기틀을 마련한 독일의 작곡가이자 악보 출판업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작품을 출판했으며, 이들은 호프마이스터의 친구이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그에게 곡을 헌정했으며, 베토벤은 편지에서 그를 '가장 신뢰하는 친구'라고 표현했다. 




베토벤이 공작에게 보낸 이 편지를 끝으로 둘 사이의 오랜 후원 관계가 끝을 맺고, 그동안 공작이 지급했던 연금도 끊어졌습니다. 물론 베토벤도 귀족들의 후원을 받고 또 후원을 받기 위해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당시의 다른 어떤 음악가나 예술가보다도 독립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바흐나 하이든 같은 선배 작곡가들처럼 왕이나 귀족의 고용인으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재능과 작품을 시장에 파는 독립적인 사업가로 살고자 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베토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18세기 후반 유럽과 북미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음악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정신적 스승 계몽주의


베토벤은 1770년에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는 300여 개의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쾰른 선제후국의 중심 도시인 본에서 태어나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후기 계몽주의, 1789년 프랑스 혁명, 1792년 혁명전쟁, 1804년 나폴레옹 제국 그리고 1815년 왕정 복고 등으로 이어진 격랑의 시기였습니다. 베토벤은 22세인 1792년에 빈으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는데, 1805년 말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이전의 교향곡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불협화음과 새로운 음악적 지향은 베토벤이 시대의 변화를 체감하고 이를 깊이 고민한 결과물입니다. 무엇보다 베토벤은 계몽주의3)를 접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철학이자 시대정신으로 여겼습니다.


3) 계몽주의: 합리적 이성의 힘으로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17, 18세기의 시대적 사조(思潮)를 지칭한다. 




베토벤에게는 전쟁의 격렬한 포성도 새로운 음악을 자극하는 소리였는지 모릅니다. 이전의 교향곡에서 볼 수 없었던 베토벤 특유의 불협화음에는 시대의 흐름을 고민하고 배움으로써, 이를 자신의 음악에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1784년에 황제 요제프 2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프란츠가 쾰른 선제후국의 새로운 선제후로 부임한 후, 본은 계몽주의의 중심지로 발돋움했습니다. 1785년, 선제후는 본 아카데미를 대학으로 승격시켰고, 음악문학극장을 후원하면서 교육과 문화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덕분에 베토벤은 이 시기에 칸트와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저작을 구해 읽기도 하고 대학의 강연회에도 참석하면서 계몽주의를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베토벤의 스승인 크리스티안 네페4)는 프리메이슨5), 독서협회 등을 주도하면서 제자 베토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스승을 따라 베토벤 자신도 프리메이슨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4) 크리스티안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독일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라이프치히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음악으로 전향했다. 1782년 본 궁정 오르간 연주자이자 극장 지휘자로 활약할 당시 베토벤을 가르쳤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네페는 음악 뿐 아니라 정서적, 철학적인 모든 면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었다. 


5) 프리메이슨(Freemason): 계몽주의 사조에 호응하여 자유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기존의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을 옹호하는 정부로부터 탄압받으며 비밀 결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당시 프리메이슨은 이신론(자연종교)을 믿는 비밀 결사였기에 교회와 정부의 탄압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성직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 결사에 가입했으며 프랑스 혁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더군다나 하이든과 모차르트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기 때문에 베토벤도 단원으로 가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베토벤이 계몽 군주인 요제프 2세의 죽음을 기리는 칸타타를 작곡한 것은 이와 같은 계몽주의에 대한 애정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본을 떠나기 직전 베토벤은 “가능한 모든 선행을 하고 무엇보다도 자유를 사랑하며, 왕 앞이라 해도 진실을 부정하지는 말 것”을 신조로 삼는다고 썼는데, 아마도 계몽주의의 여러 의미 가운데 이 정도가 베토벤이 받아들인 계몽주의일 것입니다. 제국에서는 계몽주의가 계몽 군주 주도로 ‘위로부터’ 실현되고 있었다면, 프랑스에서는 1789년에 혁명으로 폭발했습니다. 후일 베토벤은 자신이 10대 말에 혁명의 열기에 빠졌음을 고백한 적이 있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프랑스 혁명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베토벤이 열광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해 전제 군주에 저항하고, 의회를 만들고, ‘인권선언’을 발표한 그 혁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곧바로 과격해져 무시무시한 공포 정치로 탈선했고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1815년의 왕정 복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열광한 베토벤에게 이 같은 혁명의 변질은 더없는 환멸감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을까요.



하이든에 반항한 베토벤, 시대의 고민을 담다

 


베토벤은 ‘악성(樂聖)’이기 전에 번민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완전무결하고 조화로운 음악보다 고민과 갈등을 담은 불협화음을, 궁정악장 하이든의 가르침보다 시대의 격렬한 변화를 좇았습니다.


혁명은 곧바로 과격해져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박해하며, 1792년 4월에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 포고하고, 1794년 7월까지는 극악한 공포 정치를 자행하다가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한 후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황제 선포 등으로 이어집니다. 공포 정치와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변질된 프랑스 혁명은 베토벤에게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특히 베토벤은 쾰른 선제후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고, 빈에 와서는 리히노프스키 공작 같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으니, 반귀족적인 프랑스 혁명에 대한 애정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는 없었습니다.


베토벤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판(van)6) 베토벤이 아니라 폰(von)7) 베토벤이라며 귀족인 양 사칭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 등 혁명과 귀족에 대한 동경을 모두 지녔던 것처럼 보입니다.


6, 7) 판(van), 폰(von): 'van'은 평민의 이름에 붙는 성(姓) 접두어였으며, 'von'은 귀족의 이름에 붙는 접두어였다.   


베토벤은 쾰른 선제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1792년 11월 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음악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베토벤이 본을 떠난 시기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포고한 때였습니다. 흥분한 파리 민중은 9월에 감옥을 공격하여 1,000명이 넘는 수인을 즉결 처형하는 광기와 함께 유럽의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베토벤의 조국인 쾰른 선제후국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이 같은 프랑스의 침략 전쟁에 베토벤의 고향인 본도 프랑스에 합병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자신의 조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베토벤은 조국을 떠나 빈에 음악 유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조국인 쾰른 선제후국은 2년 후에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합병되었습니다.


 

빈에서 조국의 패망을 볼 때 베토벤의 느낌은 어땠을까요. 귀족에게 고용된 궁정악장 하이든과 불화8)했던 자유로운 음악가 베토벤이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혁명을 무조건 찬양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불협화음으로 구성된 그의 교향곡 3번 <영웅>은 혁명에 대한 동경과 환멸, 귀족에 대한 선망과 반항심 사이에서 갈등했던 베토벤의 심경이 표출된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그의 스승 하이든이 <영웅> 리허설을 듣고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그 이전의 교향곡이 조화와 균형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괴로움ㆍ갈등ㆍ비탄과 같은 보다 새롭고 인간적인 고민과 감정을 구현했습니다. 사실 베토벤을 다루는 많은 클래식 음악 관련 책은 그를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혹은 단선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토벤이 프랑스를 혁명의 나라라고 환호했다거나, 나폴레옹을 찬양했다는 이야기는 역사학적으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흔히 베토벤이 1803년 교향곡 <영웅>을 작곡하면서 나폴레옹9)에게 헌정할 생각이었다는 음악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가 친프랑스적인 인사들을 탄압하고 있던 상황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해석입니다. 보다 엄밀한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찬양했다는 설명보다, 나폴레옹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의 환심을 사려고 곡을 헌정하려 했다는 설명이 합당합니다.


8) 하이든과 불화: 하이든의 제자였던 베토벤은 그와 불화를 거듭했지만, 하이든이 죽음을 앞둔 몇 해 동안 다시 화해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9)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éon Bonaparte):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 정부 체제를 붕괴시키고, 제1통령과 종신 통령 등으로 독재의 기반을 다진 다음, 1804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러시아원정 실패로 엘바섬에, 워털루전투 패배로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이 번민하고 갈등하는, 인간의 운명을 표현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도 음악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를 조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김응종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프랑스 프랑쉬 콩테 대학교 박사.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서양사학자로 <관용의 역사> 등 근대 유럽사를 다룬 책을 다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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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계몽 군주들은 음악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생긴 음악당과 연주회는 새로운 시민 계급을 성장시켰습니다. 후배 음악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하이든의 행동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예술과 더불어 사회 개혁에 나선 18세기의 계몽 군주들


18세기까지 거의 모든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결국 실용 음악에 속했습니다. 예배의 경건함을 도모하거나 궁정의 연희를 흥겹게 하면서 귀족의 행사에 품격을 더하는 음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대의 작곡가 역시 대개 궁정 음악가1)이거나 교회 음악가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음악 담당 공무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 궁정 음악가 : 궁정 음악가는 안정적인 수익과 지위 때문에 대부분의 음악가가 선망하는 직업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 귀족의 취향에 복무하는 고리타분한 음악가로 폄훼되기도 했다. 18세기는 이와 같은 궁정 음악가에 대한 평가가 점차 바뀌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정치에 예속된 예술’로 좁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들이 지배하던 시절은 궁정 문화가 세속의 거의 모든 문화에 깊고 넓은 영향력을 펼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의 음악가들은 시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시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악가이자 이후 도래하게 될 시민 문화 시대를 예고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비발디와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있었기에 베토벤과 슈베르트2)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변화의 조짐은 18세기 중엽 이후 전개되었습니다. 계몽 군주, 즉 절대 권력을 지닌 군주지만 계몽주의 사상을 일정하게 받아들인 중북부 유럽의 군주들은 실력 있는 예술가를 두루 초빙하고 그들을 후원하여 궁정 문화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이 대표적입니다. 계몽 군주들과 각 지역의 귀족이나 중산계급들은 전문 음악당을 설치하고 근대적인 악단을 구성하였으며 능력 있는 작곡가를 지속적으로 후원했습니다. 파리에서는 1725년에 연속 공개 연주회가 열렸으며,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1781년에 열린 연주회는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그 장소가 지금도 유명한 게반트하우스3)입니다.


2)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 빈 고전파 이후 나타난 18~19세기 낭만주의 악파의 대표 주자로 음악의 선율에 낭만주의적 감성을 불어넣은 작곡가다.


3)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세계적인 콘서트 홀. 게반트하우스는 직물회관 또는 양복회관이라는 뜻으로, 1781년 라이프치히의 부유한 상인들이 악사를 고용, 음악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런던에서는 1762년 이후 연주회를 위한 협회가 공식적으로 창립되었으며 1771년 빈, 1790년 베를린 등 비슷한 시기에 이 같은 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히 예술가를 후원해 다양한 문화 활동이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특히 중북부 유럽의 계몽 군주와 각 지역 귀족들이 여러 사상과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이 새로운 사상과 예술로 하여금 지속적인 사회 개혁과 문화적 혁신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관습이나 양식에 의존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개혁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혁신적인 예술가들을 적극 초빙하여 거대한 시대적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하이든의 삶에는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변방 마을 로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느 음악가와 달리 하이든은 가난한 목수 부모 밑에서 컸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없었더라면 하이든은 도제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평생을 꼼꼼하고 성실한 목수로 살았을 것입니다.


계몽 군주 시대의 바흐와 시민 계급 시대의 베토벤을 이으라는 신의 계획이었을까요? 신은 그에게 풍부한 음악적 재능을 부여했습니다. 부모는 일찌감치 그의 음악적 능력을 알아보고 근처 마을인 하인부르크 학교 교장이자 성가대 지휘자인 친척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를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여섯 살 무렵 집을 떠난 하이든은 교회 성가대원이 되고 능력을 인정받아 빈으로 입성, 성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됩니다.



음악가를 지원하는 대신 저작권 등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다른 후원자들과 달리, 계몽 군주였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하이든의 창조적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후작이 하이든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지원했듯, 훗날 하이든도 후배들의 새로운 음악을 지원하고 격려했습니다.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로 길러낸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이든이 성장 과정에서 익힌 최고의 덕목은 주어진 여건에 충실하게 일하는 견실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6세 무렵 집을 떠나 하인부르크로 이주했을 때, 또 그곳에서 성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었을 때, 그리고 성년이 되어 음악가로서 직업을 얻고자 했을 때에도 그에게 요구되고 그가 가장 크게 발휘한 미덕은 성실한 직업적 태도였습니다. 때로는 일상 업무가 가혹했고 때로는 엄격한 신분 질서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이를 평생에 걸쳐 묵묵히 참으며 인내하였습니다.


전기(電氣)는 없었고 전례(典禮)는 많던 시대였습니다. 성스러운 종교 공간인 성당에서는 매일같이 미사가 올려졌고 세속의 최고 기구인 궁정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가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이 전례와 행사를 위해 매일 바쁘게 일을 했습니다. 음악가의 신분도 요리사∙마부∙정원사∙시종 등과 엇비슷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헝가리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에서 근무한 하이든은 숙명처럼 주어진 자신의 신분과 직위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궁정이나 귀족이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가는 음악가에게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고용주가 과거의 형식에 만족해 늘 비슷한 곡만 요구한다면 음악가는 평생 그 궁정에서 낡고 닳은 음악만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하이든을 고용한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계몽 군주였습니다. 빈에서 4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이젠슈타트의 대저택에서 이 후작은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향곡’이었습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걸출한 교향곡을 남겼음에도 이른바 ‘교향곡의 아버지’로 하이든이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양식을 작곡할 만한 비범한 능력이 있었고, 또 다행히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생애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생의 정점을 찍은 다음의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이든은 평생 하인 복장을 하고, 궁정악장으로서 충실히 복무했던 예술가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를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이후의 예술가들, 즉 보다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었던 시대의 음악가와 단순 비교해 궁정 예법과 신분 사회에 굴복한 예술가라는 식으로 폄하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의 불운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입니다.



시대의 징검다리를 자처한 하이든


하이든은 자기가 살던 시대에 주어진 관습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덧 자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활기차게 시작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새 시대의 개막에 동참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30년 가까이 봉직한 그는 1790년에 이윽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대저택을 나와서야 하이든은 자기의 이름이 유럽 각국에 펼쳐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그는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만년의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후배 작곡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이든은 단지 작곡 기법만 가르친 게 아니라 연금과 작품료를 털어 가난한 후배들을 경제적으로도 지원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제자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입니다.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천재 모차르트와 거침없이 시민 시대의 횃불을 들었던 베토벤이 더욱 돋보이도록 하이든이 두 사람과 교우한 것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그 시대를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저명한 선배의 추천을 받아야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하이든은 빈의 유력한 가문과 사교계에 두 사람을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교향곡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웅장한 작품을 쓰는 데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24세나 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일찌감치 간파하였습니다. 나이를 뛰어넘어 모차르트와 친구로 교류하며 현악 4중주 기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모차르트도 하이든의 배려에 감복해 6곡의 현악 4중주를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 역시 하이든의 만년의 대작, <천지창조>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808년,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기념하는 빈 연주회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을 때, 병상의 그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하자 그동안 그와 불편한 관계4)였던 베토벤은 공연이 끝난 후 무릎을 꿇고 하이든의 손에 존경과 화해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이미 세상은 베토벤의 시대였고 그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천지를 격동하던 때였지만 베토벤은 그를 바흐, 헨델 그리고 모차르트에 비견될 존재로 인정하였습니다.


4) 불편한 관계 :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처음 구상했던 1801년만 해도 베토벤은 하이든을 싫어했으나, 이 곡이 완성된 1808년 무렵에는 둘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1809년, 빈은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면서도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집 근처만은 포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 군인들을 보내 경비를 서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군인들이 경의를 표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누구보다 근면하게 살아냈고 훗날의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하이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예우였습니다.


하이든은 안정적인 직업을 바탕으로 상당한 경제적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젊은 후배 음악가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하이든이 자신의 영광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강연을 중심으로 고전 음악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 평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클래식, 시대를 듣다> 등 10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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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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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자처하는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평생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감내한 이유는 귀족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궁정 음악을 벗어난 자유 음악가로의 꿈


베토벤은 궁정악단에 종사하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태생적으로 궁정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혼란과 격동이 혼재하는 격변의 시대에 베토벤은 안정적인 궁정 음악가의 길을 거부하고, 자유 음악가1)의 길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당시 자유 음악가는 감당해야 할 경제적 리스크가 큰 탓에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자유음악가의 길을 시도한 선배 음악가들이 실패했기에 그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교회가 주는 고정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개최하여 이익을 얻는 길을 모색한 비발디2)나 모차르트가 끝내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을 모두가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1)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 비발디가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난 사례라면, 베토벤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로 자유음악가의 꿈을 실현한 고전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2) 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 이탈리아의 작곡자이자 연주자이면서 사제. 오페라 등 새로운 영역을 시도하며 음악 대중화에 힘썼지만,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흥행 요소’가 있는 음악 활동을 금지 당해 가난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것은 그 영광만큼의 커다란 고통과 고난이라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의 길을 택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랑스 혁명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로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군주제 아래서 군주, 귀족이 조직한 악단에서 급여를 받고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 내지 하인으로서의 음악가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모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기 시작한 상태에서 베토벤이 선택한 자유 음악가의 길은 고난이 예정된 미래나 다름없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난청 증세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고독한 운명을 이겨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토벤의 생애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더욱이 1809년이 되자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날로 위세를 떨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침략하면서 음식비가 매년 무려 50%씩이나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3)는 이와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 탄생한 곡입니다. 전쟁을 피해 귀족들 대부분이 빈을 떠났지만 베토벤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남아 창작에 집중했습니다. 자유 음악가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베토벤이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 그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전쟁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큰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악보 출판과 음악회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음악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끝없는 가난, 끊임없는 독립의 꿈


나폴레옹군의 빈 진주 당시 베토벤이 스스로 물가를 기록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은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해르텔’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구두 한 켤레를 30플로린, 코트 한 벌을 60~70플로린에 구입했는데, 1792년에는 6플로린이었던 구두를 1810년에는 30플로린에 구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서술을 보면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가 1792년에서 1810년 사이에 무려 여섯 배나 상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베토벤의 편지에는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1816년 람베르티 백작으로부터 임차한 주택으로 이사했는데, 임차료가 무려 500플로린에서 5,500플로린으로 10배 이상 올랐다.’는 푸념도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이 당시 빈의 피아노 제조업자 난네테 쉬트라이허에게 쓴 편지에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베토벤의 친구이자 악보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4)는 비교적 저렴한 빈 교외로 이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때 베토벤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벽지를 직접 도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4) 토비아스 하슬링거(Tobias Haslinger) : 음악상의 경영자이자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한 출판업자이다. 베토벤은 시외에 살며 빈 시내에 들를 때마다 하슬링거의 상점을 찾아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개인 사교장처럼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음악 도시 빈에서 명성을 얻은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생애 최초로 자신이 기획하여 수익을 갖는 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1800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극장에서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 음악가의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정신과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귀족의 후원에 기대지 않는 자유 음악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지만 악보 출판업의 부흥 등 주변 환경의 변화는 이 같은 베토벤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하고,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6~7개 유명 악보 출판사의 러브 콜을 받는 등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1807년에는 황제의 궁정 악장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전임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받았던 연봉의 두 배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황제 궁정악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작곡해야 하는 작품 중 오페라가 3번 이상 공연될 경우 세 번째 공연부터는 그 수익을 자신이 가져가고, 연 1회 개인적 음악회를 허용해 달라는 파격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물론 이 같은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베토벤이 세계 최고의 궁정악장 자리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고유의 예술 세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황제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자리도 베토벤이 가진 자유 음악가에 대한 꿈을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 혹은 소송


베토벤의 삶은 자유 음악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독립과 예술적 자유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806년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5) 공작이 오스트리아에 진격해 온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베토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토벤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원이 중단되면서 베토벤은 다시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5)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Karl von Lichnowsky) :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 모차르트에 이어 베토벤을 후원했다. 1800년부터 1806년까지 베토벤에게 매해 600플로린을 제공했으며,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걸작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베토벤이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를 알아차린 신생국 베스트팔리아 왕국의 왕이자 나폴레옹의 친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왕국의 수도 카셀의 궁정악장직을 베토벤에게 제의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연금보다 거의 네 배 이상의 거액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토벤을 빈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빈의 음악 애호가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 롭코비츠 공작이 각각 1,800플로린, 1,500플로린, 7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총 4,000플로린이 모였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가 약속한 연봉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기에 베토벤은 빈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사용하면서 통화 수단이던 플로린은 1811년에 가치가 폭락하였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약속받은 연금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루돌프 대공만이 간신히 연금을 지급하였고, 킨스키 공작은 파산 후 사망하였습니다. 롭코비츠 공작도 파산을 선언하며 연금의 지급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1813년 롭코비츠 공작과 1815년 킨스키 공작 가문에 각각 소송을 제기하여 밀린 연금을 받아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소송까지 해서 후원금을 강요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거나 베토벤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마치 6.25전쟁 직후와 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후원이 끊기자 베토벤에게 남은 수익 모델은 악보 출판업자를 통한 악보 판매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당시는 출판사에 작품을 넘기면 일회성으로 뭉칫돈을 받고 이후의 판매 독점권까지 양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과정에서 작품 번호6)를 잘 챙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출판을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잘 관리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인데요. 훗날의 일이지만 베토벤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악보 출판 시 작품 번호를 기준으로 저작권의 혜택을 받고 자유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저작권법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6) 작품 번호(Opus Number) : 오푸스(Opus)는 작품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보통 약자를 써 Op.1, Op.23 등으로 클래식 작품에 번호를 붙인다. 작품 번호는 17세기 후반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며 표지에 기재되기 시작한 방식이다. 베토벤은 스스로 자신의 음악 작품에 번호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로, 그의 사후 발견된 유작에는 ‘WoO. 번호’를 매긴다. ‘WoO.’는 ‘작품 번호 없음(Werks Ohne Opuszahl : Works without Opus number)’ 이라는 뜻이다.


당시 음악가들은 초판에 한해서만 출판업자로부터 판매 수입을 배당받고 재판부터는 배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색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먼저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정식 출판하기 전 6개월에서 12개월 사이의 독점 사용권을 귀족에게 판매했습니다. 사용권이 만료되고 나면 비로소 출판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작품을 여러 번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장엄 미사곡 Op.123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출판을 시도해 작품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먼저 독일 본의 출판업자 니콜라우스 폰 짐록에게 Op.123의 3년 독점 사용권을 판매했고, 친구이자 출판업자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라이프치히의 페터스 출판사,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타리아 출판사, 마인츠의 쇼트(Schott)7) 출판사, 총 네 곳에 3년 후 판매를 조건으로 같은 작품을 재판매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장엄 미사곡의 초판 첫 페이지에 자신의 서명을 쓴 악보를 총 28개 만들어 궁정악단에 판매하고,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10개국의 주문을 받아 추가 수입을 올렸습니다.


7) 쇼트(Shott) : 베토벤과 악보 출판계약을 맺었던 출판사로 1770년 창립해 250여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 출판 기업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는 물론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클래식 거장들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귀족에게는 일정 기간 독점 사용권 비용을 받고, 이후에 다시 다양한 루트의 출판을 모색하고 여기에 초판 사인본의 판매와 해외 판매까지, 베토벤은 단 한 작품으로 수많은 버전을 만들어 재판매하며 상당한 부가 수익을 거둬들였습니다. 음악사상 실질적으로 처음 자유 음악가의 길에 들어선 베토벤은 이처럼 경제적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고, 이러한 노력은 후배 음악가들이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데 훌륭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악보에 번호를 붙이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이것은 더 많은 출판 수익을 거두기 위해 찾아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번호에는 숫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조병선 청주대학교 법학과 교수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법학박사. 사법연수원, 법과대학원 등에서 ‘법과 음악’을 주제로 한 강의를 하고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 진행한 <클래식 법정>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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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해답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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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인에게 와인은 건강 음료였습니다. 베토벤의 할머니부터 아버지까지 집안 대대로 와인을 물처럼 마시곤 했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18세기 유럽에 버금갈 정도로 알코올에 관대한 대한민국. 베토벤의 이야기 속에는 한국인 특유의 음주 습관에 경종을 울릴 만한 성찰이 숨어 있습니다.


의학사에 ‘알코올 중독’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베토벤이 죽은 뒤 20여 년이 지난 1849년이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도 와인은 건강 음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후대인들이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베토벤이 안다면 무척이나 억울해하지 않을까요?



베토벤의 운명을 바꾼 할아버지의 부업


베토벤이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 음악가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교회나 궁정에 소속돼 활동하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분한 수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8세기의 평범한 음악가들은 여러 가지 부업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부업은 악보 출판이었습니다.

 

바흐 같은 음악가는 결혼식, 장례식 음악을 부업으로 삼다 보니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많아지면 수입이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베토벤의 조부이자 이름도 같았던 루트비히판 베토벤의 부업이 와인 판매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존경받는 궁정악장이자 베이스 가수였던 베토벤의 조부는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와인 판매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보다 일종의 재테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와인은 깨끗하지 못한 식수를 대신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생활에 밀착한 상품이었습니다. 다만 베토벤가(家)의 누구도 이 같은 부업이 비극의 씨앗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부업 때문에 베토벤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와인을 더 많이 마시고 소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베토벤의 할머니는 말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그 아들인 요한, 즉 베토벤의 아버지도 극심한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자신의 삶을 망가트렸습니다.


알코올 중독인 부모 혹은 조부모 아래서 성장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알코올 중독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은 대부분 연구에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상반된 의견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상관(相關) 관계와 인과(因果) 관계를 구분하고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음악 관련 책에서는 베토벤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일종의 가족력(家族歷)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알코올 중독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는 알코올 중독과 상관 관계는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전적 질환과 같은 인과 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베토벤이 알코올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와인을 많이 마셨다고는 하지만, 당시 와인은 지금으로 치면 조금 더 비싼 음료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의학사에서 알코올 의존성 때문에 생기는 건강 문제를 지적하고 ‘알코올 중독’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베토벤이 죽은 지 20여 년 후인 1849년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때도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만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19세기 말까지 와인이나 맥주, 사과주 등 발효주는 건강 음료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가(家)의 와인 사랑은 건강한 습관


베토벤이 살던 18세기에는 상하수도 시설1)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인성 (水因性) 전염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병을 한두 번씩 경험한 이도 많았습니다. 특히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들은 흔히 내이염, 중이염 등으로 청력이 손상되는 경우가 많았고 베토벤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 상하수도 시설: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술 발전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들을 대거 탄생시켰으나 동시에 공중위생 시설의 부족 등으로 인한 전염병의 확산에 기여했다. 특히 상하수도 시설의 부족은 이 같은 공중위생의 핵심적 문제였다. 독일은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출범과 함께 네덜란드인 기술자를 불러와 베를린과 포츠담에 운하와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었다.


 


이처럼 베토벤이 청력을 잃게 된 것은 장티푸스의 후유증이기도 하고, 더 근본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위생 환경이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18세기는 오스트리아 빈, 체코 프라하 같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 같은 전염병이 더 빨리, 더 많은 이에게 퍼져 피해가 컸습니다. 때문에 더러운 물 대신 와인을 마시는 일은 이 같은 수인성 전염병으로부터 건강을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베토벤이 와인에 친숙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이른 나이에 건강을 잃고 사망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베토벤가 사람들의 와인 사랑은 건강한 습관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인과 관계를 보다 세밀하게 살피다 보면 지금까지 고려되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제3의 요인이 진짜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관관계를 인과 관계로 착각하는 것은 단순히 관련되어 있는 두 대상을 어느 하나가 원인이고 다른 것은 결과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음악 관련 서적에서 베토벤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일종의 가족력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는 부분은 재고할 여지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알코올 중독은 유전적 질환과 인과 관계가 있다기보다 당시 수인성 전염병의 확산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 판단에 가깝습니다.


1인당 술 소비량 세계 13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18세기 유럽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술에 관대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럽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한 식수에 불안을 느껴 와인에 관대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에도 생각하지 못한 인과 관계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요?



아난다마이드와 한국인의 ‘아무거나’ 문화



한국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별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한참을 고민하고 메뉴에도 없는 추가 사항을 덧붙이는 외국인들에 비하면 주문도 간단하고 특별히 자신의 취향에 따라 이런저런 요구를 더하는 법도 없습니다. ‘아무거나’라는 주문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죠.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남들의 선택을 따라 하거나, 아예 자신의 취향을 생각해본 적도 없이 ‘몰취향’으로 살아갑니다. 비단 음식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죠. 음식뿐 아니라 옷, 선호하는 브랜드나 삶의 방식에서도 자신만의 개성보다는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을 더 우선시합니다.


반면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 자신의 취향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행복감을 쉽게 느끼고 뇌에서는 아난다마이드2)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많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도박ㆍ약물ㆍ게임 등에 대해 중독자가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 많습니다. 행복한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만 끊임없이 집착하고 몰두할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피하고 막아야 하는 것에 관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무엇을 싫어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짧은 시간에도 굉장히 많은 대답을 하지만 ‘무엇을 좋아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리면서 ‘그저 아무거나’라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잘 모른다는 방증입니다.


2) 아난다마이드 (Anandamide): ‘행복’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인 ‘아난다’에서 따온 신경 전달 물질.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화학 물질로 몸속 마리화나, 내인성 모르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분비됐다가 금세 분해되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 성분이 잘 분비되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시름을 잠시 피하게 만들어주는 혹은 외면하게 만들어주는 불안 완화제, 즉 술에 몰입하기 쉬운 성격으로 살아갑니다. 외국 심리학자들이 흔히 “한국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시면서 화내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움을 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고 말합니다. 술이라는 도구가 행복이나 기쁨 촉진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만큼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술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일한 진정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들여다보면 술에 관대하기보다 술 이외의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는 법


베토벤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사가들이 묘사한 베토벤을 살펴보면 스승ㆍ연인ㆍ가족 누구와도 관계 맺기에 미숙하고, 쉽게 불화했으며, 음악 이외에는 다른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즉 중독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었던 것이죠. 

 



결국 중독이란 만성적 습관이 만들어내는 부정적 결과입니다. 특정 습관이 지속되어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가 되고, 결국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 결과를 우리가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독의 원인은 습관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특히 음주에 빠진 사람들이 가진 편견이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이 나쁜 습관을 없앨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의지만으로 나쁜 습관, 즉 중독을 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로이 보마이스터3) 교수에 의하면 나쁜 관행이나 습관을 의지력으로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무모하면서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곤해서 의지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 평소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3) 로이 보마이스터(Roy Baumeister):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 특히 그는 관행이나 습관을 의지력으로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역설하는 심리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자아고갈(Ego Depletion)’은 사람이 억지로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채찍질하면 이후 다른 상황에서 자제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거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중독을 만드는 나쁜 습관을 억제하려고만 한다면 결국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특히 그 사람의 의지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그 실패의 가능성은 극대화됩니다. 나쁜 습관은 다른 좋은 습관으로 덮어씌워야 없어집니다. 여행, 대화, 좋은 사람들과 맛난 음식 먹기 등 좋은 습관들을 만들어 대체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수많은 좋은 것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국내에 드문 인지심리학 전문가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 Austin 심리학 박사,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 한국음악지각인지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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