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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화제만발 가족 여러분~ 오지라퍼입니다.

영화판에서 잔뼈 굵은 두 배우가 만났습니다. 명품 배우 유해진 씨와 김윤석 씨가 영화 <극비수사>에서 주연으로 뭉쳤는데요. 유괴된 아이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는 '도사'와 '형사' 이야기! 그런데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 아셨나요? 대체 1978년 부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978년 대한민국은? 

갑작스런 산업화 발전으로 '한강의 기적'을 맛 본 대한민국. 하지만 그 기적 뒤엔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바로 빈부의 격차인데요. 그 폐단 때문일까요? 아이를 납치해 돈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사건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극비수사>의 배경 역시 1978년 실제로 일어난 부산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을 배경으로 많은 영화를 만든 '곽경택 감독'이 이번에도 부산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메가폰을 잡았는데요. 

감독이 이야기한 두 분 중 한 명은 형사이고. 또 한 명은 도사, 김중산 씨입니다. 형사와 점술가라~ 둘은 어떻게 손을 잡게 된 것일까요?


 


1978년 부산 유괴 사건 - 두 번 유괴된 정모 양 유괴 사건

 

유난히 유괴사건이 빈번했던 1970년대. 미성년자 유괴죄의 처벌이 대폭 강화됐지만 좀처럼 유괴사건이 끊이질 않았던 그 시절.

부산의 한 초등학생이 1978년, 그리고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유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범인 검거를 위해 국내 최초로 최면 수사 도입하는데요. 1979년에 발생했던 2차 사건의 경우 아이의 몸값이 유괴 사상 최고 액수였던 1억5천만 원에 달했고,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할 정도로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아이의 1, 2차 유괴 사건은 모두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며 사건은 일단락됩니다.


정모 양는 수산회사를 운영하며 사업에 제법 성공한 아버지덕에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할 것 하나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78년 9월 15일,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하굣길에 나섰는데요.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기사 하나를 살펴보면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요. 


1978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한 사업가의 외동딸인 정모 양이 유괴된 지 33일 만에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정모 양은 부산 수산업체 대표 정씨의 막내로 외동딸인데요. 

1978년 9월 15일 낮 12시 30분 경에 하교하는 정모 양을 범인은 자기 승용차로 유인해 유괴했고 이후 20여 차례에 걸쳐 협박 전화와 편지 등으로 정모 양 대신 5천만 원이라는 돈을 요구했습니다. 

범인은 승객을 태워서 부산에 갔다가 부유한 아이들이 다닌다는 사립초등학교 앞에서 정모 양을 유괴하게 됐다고 범행 의도를 밝혔습니다. 정모 양이 범인에게 유괴된 후 23시간 뒤, 16일 낮에 집으로 처음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9번 정도 전화가 걸려왔으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습니다.


29일 오후 5시 7분에 걸려온 전화에서 범인은 편지를 보냈다고 밝혔는데요. 이 편지는 10월 2일에 도착했고 정모 양 대신 5천만 원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봉투 안에는 해당 내용을 담아 범인이 왼손으로 쓴 듯한 편지와 함께 정모 양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정모 양이 쓴 것 같은 편지가 왔고 그 편지와 함께 범인이 '10월 8일 오후 6~7시 사이에 돈을 가지고 송도갈비집으로 와라'고 적힌 내용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추적했지만 검거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구까지 가는 거리 중 중간에 흰가루를 뿌려두었으니 거기에 돈을 두라고 한 범인의 전화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수사를 펼쳤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0월 16일 저녁 7시 30분 경 범인이 전화를 걸어와 '서울에 있는 이모집을 연락처로 삼겠다'고 말해 경찰은 서울로 수사망을 좁혀갔습니다.


10월 18일 밤 10시 20분경 여의도에서 범인은 공길용 형사에게 검거됐고 정모 양은 범인이 검거되고 난 뒤 신촌 만화가게에서 경찰에 의해 인도되어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어우~ 37년 전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살펴보는 도중에도 파르르~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는데요. 그래도 피해 아동이 무사하고 범인도 검거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모 양은 당시 어땠을까요? 33일 동안 어떻게 도피행각을 벌인 것일까요?


 

1978년 《동아일보》기사에 따르면 유괴되었던 기간 동안 범인은 정모 양에게 불고기를 먹이고 옷도 갈아 입혀주었다고 합니다. 그때문인지 정모 양은 범인이 나쁜 사람인지 몰랐다고 하네요. 


범인은 9월 15일에 하교하는 아이들에게 트렁크를 닫아달라고 말을 건 뒤, 집까지 태워주겠다며 아이들을 차에 태웠다고 합니다. 이후 다른 아이들은 내려주고 정모 양만 태운 채 출발했다고 해요. 낮에는 정모 양을 트렁크에 태우고 밤에는 밖에 나와 잠을 자게 했답니다. 


하지만 유괴는 잠복 중이던 공길용 형사에 의해 범인이 잡히게 되면서 33일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범인을 검거한 부산진경찰서 공길용 형사가 바로 영화 <극비수사>에서 김윤석 씨가 맡은 주인공입니다. 실제 공 경사는 정모 양 사건을 포함해 1971년 부산 송미장 여관 암달러상 살해범 검거, 1975년 영도 청학동 수출품 컨테이너선 도난사건 이후 1980년 미국문화원방화사건 등을 해결하며 순경에서 경감까지 4번의 특진을 해 '포도왕'으로 불린 인물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주인공, '김중산'에 대해선 어떤 말도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 유괴 사건에 뛰어 들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누구일까요?


 

아이가 살아 있다고 유일하게 말한 역리학자, 김중산

 

형사, '공길용'을 도와 사건을 해결한 김중산은 현재도 부산에서 활동하고 계신 유명한 역리학자입니다.

일부는 그를 무속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부산에서 응봉 김중산, 김도사로 불리는 명리학, 역학계의 대가입니다.

그는 부산 서구 동대신동2가 2층 단독주택에서 사주 등을 통해 점을 봐주고 있으며 그 집에 '취도지재(就道之齋)'라 이름 붙어 있다고 합니다.

 


 

정모 양이 유괴된 후 아이의 엄마와 이모는 철학관을 찾아 다니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이의 행방을 쫓아다닙니다. 대부분의 철학관은 정모 양의 사주에 금과 쇠가 많아서 팔자가 세서 죽었을거라 얘기하지만 김중산 도사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죠. 센 팔자 덕분에 오히려 살아 남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땅에 금과 쇠가 묻혀 있기 때문에 이를 씻어 낼 물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그 필요한 사람이 바로 '공길용' 형사였습니다!

 

결국 부모의 부탁으로 김중산 도사는 아이를 찾는 일을 돕기 시작합니다.

 

당시 최초로 최면술 수사를 활용해, 범행 당시 같이 범인의 차를 탔던 친구를 통해 차량 번호를 알아내는 성과를 거둡니다.

 

그런데 정모 양은 1978년에 이어 1979년에 또 다시 유괴됩니다.

이에 김중산 도사와 공길용 형사가 또 한번 나서게 되는데요. 이때 역시, '수'자 낀날 아이가 돌아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하죠.

 

그러나 비공개로 진행되었던 수사였던 만큼 공길용 형사와 김중산 도사의 이야기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고, 지금 그 둘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면 다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일전에 <이영돈 PD가 간다 -10대 점술가>로 선정되기도 했던 김중산 도사.

아마 영화로 인해 김 도사에 대한 관심이 또 다시 뜨거울 것 같네요. ^^*

 

 


영화 <극비수사>는 어떤 내용일까?

 

영화 <극비수사>에는 이미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해 사건을 공개 수사로 전환하자는 서울 수사팀, 그들에게 공적을 뺏길까 부산으로 범인을 유인해 체포하자는 부산 형사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이에는 오로지 아이의 생사만을 걱정했던 도사 김중산과 형사 공길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부모의 간곡한 요청으로 아이의 생사를 점쳤던 김중산 도사는 자신이 사주를 보고 뽑은 경찰만이 아이를 살릴 수 있으며, 그 인물이 바로 공길용 형사라고 확신했는데요. 


김중산 도사는 “다른 철학인이나, 무속인들은 아이의 사주를 보고 다 죽었다고 그랬거든. (아이의 사주가) 세니까. 하지만 나는 반대로 세니까 살아난다. 세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다.”라고 단언하며 공길용 형사의 수사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간의 수사 경험, 그리고 아이의 생사를 확신한 김중산 도사를 믿고 뚝심 있는 수사를 펼쳤던 공길용 형사는 수사 과정에서 느꼈던 당시 심정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범인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33일 동안 그 하루하루를 넘기는데 옆에서 안보면 절대 모른다. 32일을 그 집에서 자면서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느낀 심정을. 수사관을 하면서, 경찰을 하면서 이 애를 찾을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 라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애가 살아있다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지. 애가 살아있다는 얘기를 듣고.” 라며 인터뷰를 통해 그 때 그 심정을 전했다. 


공길용 형사의 진심은 영화 <극비수사>의 드라마 곳곳에 녹아 관객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할 것 같네요.

 


 

돈을 목적으로 아이를 유괴하는 사건의 대부분은, 범인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붙잡히게 됩니다.

모두가 범인에만 집중할 때, 아이의 안위를 가장 우선 시 여겼던 두 인물. 

영화 <극비수사>는 그들을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어른들의 신념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미지 및 자료 제공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