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꾸밈 요소

화제만발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남들의 시선이 따갑다면 당당하게 표현하기 쉽지 않은데요. 하물며 내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오늘도 좋은 영화 한 편과 함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시내를 걷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점심시간 거리를 점령한 직장인 부대, 시민단체에서 회원을 모집하는 활동가들, 아이와 나들이 나온 엄마들... 때로는 개인 혹은 단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자주 눈에 띕니다. 고개가 끄덕여질 때도 있고 내 생각에 바빠 모른 척 지나갈 때도 있죠. 황당한 구호에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며 누구나 나름의 견해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주장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만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자유와 인권, 나아가 사랑의 문제는 참 어렵습니다.


  20대의 나이에 세계적인 감독이 된 자비에 돌란은 2013년 <로렌스 애니웨이>라는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어 교사인 로렌스는 약혼녀 프레드와 함께 살며 아기자기한 사랑을 키워갑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오죠. 로렌스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남자친구의 생일맞이 여행을 계획했던 프레드는 로렌스의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로렌스는 단지 ‘내가 잘못된 몸을 타고 난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프레드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진짜의 나를 찾겠다는 애인 앞에서 ‘그렇다면 나와의 관계 역시 가짜였냐’라고 되묻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근육과 남성성이 그토록 어색하고 싫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죠. 혼란에 빠진 프레드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프레드가 로렌스와 함께 하기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로렌스와 프레드의 지독한 사랑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줍니다. ‘사랑만이 유일한 치유의 길’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셈이죠. 어린 시절부터 성정체성에 대해 홀로 고민하던 로렌스는 더 이상 외로운 채로 견딜 필요가 없습니다. 여장을 하고 사회에 나서는 과정에서 힘을 주는 약혼녀가 있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프레드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또 다른 힘을 키워갑니다. 그 과정은 물론 험난합니다. 나도 소화시키지 못한 현실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고 항변해야 하는 프레드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된 그녀는 회사에서 잘리고, 동시에 로렌스 역시 학교에서 사직권고를 받으면서 그들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듭니다. 토요일 아침, 동네 식당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식사를 합니다. 주변의 시선이 클로즈업되고 불편한 가운데 괜찮은 척 말을 꺼내는 로렌스와 절망감에 휩싸인 프레드. 예의 없는 식당 주인의 질문공세에 프레드는 폭발합니다. ‘당신이 나처럼 살아봤어?’라며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질문도 할 자격이 없다고 윽박지르죠. 대체 누가 예의가 없는 것인지, 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지... 그녀는 매우 공격적으로 소리치고 있지만, 이미 그보다 더 큰 폭력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일까요?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일 뿐이라면 대체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틀렸어!’라는 생각이 호기심을 가장한 조롱과 폭력에 힘을 실어준 것은 아닐까요?


  영화 속 로렌스가 갖고 있는 문제를 정신장애 진단으로 분류할 때 ‘성불편증(Gender dysphoria)’에 속합니다. 성정체성과 관련된 정신의학적 관점은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동성애는 이미 오래 전(1968년)에 진단분류에서 빠졌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성적 지향 및 성 결정에 대한 자유를 지지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정체성 장애’라고 불리던 것이 최근 ‘성불편증’이라는 이름으로 순화된 것도, 성 결정 그 자체를 질환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성불편증에 속하는 이들은 잘못된 성으로 태어났다고 느끼며 고통을 겪습니다. 이를 치료하는 최종적인 방법은 성전환수술이지만 더불어 사회생활에서 찾아오는 우울 및 불안 증상에 대해서는 심리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병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죠. 로렌스와 프레드는 모두 이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인 관습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어쩌면 프레드가 식당에서 화를 낸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녀가 속 시원히 부당함을 호소했을 때,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죄의식에서 놓여나 당당히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상담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상담자도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상담자는 그들이 어떤 두려움으로 인해 꽁꽁 숨겨둔 그들 자신을 안전한 공간에서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 잘잘못을 가리거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죠. 가족도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어쨌거나, 그의 존재 자체를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더불어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국 로렌스와 프레드는 헤어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나지만 이전처럼 하나가 되지는 못합니다. 마지막에 ‘그 시절 이미, 내 고백이 아니었어도 우리 관계는 위기였다’고 말하는 로렌스의 대사는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이 유일한 치유의 길’인 것만 같았던 영화 속 장면들은 ‘사랑은 환상일 뿐이다’라며 쓴 소리를 던지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보다는 서로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만큼 참으로 고귀한 일임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10년 동안 사랑했던 로렌스와 프레드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간다 해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와 너,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 해도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힘이 사회 전반에 퍼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