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꾸밈 요소
안녕하세요, 화제만발 가족 여러분~ 오지라퍼입니다.

드라마 '정도전' 많이들 보시죠!!! 오지라퍼도 열심히 챙겨 보고 있는데요. 드디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칼을 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그가 야망의 발톱을 드러냈는데요.  드라마 흐름에 따르면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아들, '이방원'은 굳은 결심을 한 듯 보입니다.

과연, 역사 속에서 '이방원'과 '정몽주'는 어떻게 부딪혔을까요? 조선왕조 실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불리는 남자, '정몽주'!  고려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지는 '정도전'과 같지만 그 방식은 아주 다릅니다. 결국 절친이었던 둘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 각자의 정치 노선에서 가장 큰 기둥이 됩니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 정몽주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 네이버 캐스트 내용 중 -

 

위의 사실을 보자면 그는 그 당시 대단한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 학벌 좋고, 머리 좋고 거기에 집안까지 짱짱~ 하니.. 요즘 말로 하면 제대로 된 '엄친아'였던 거죠.

 

게다가 뛰어난 화술로 '명나라'와 삐그덕 거릴 때마다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외교가였습니다.

 

(정몽주의 묘 /이미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KBS 드라마 <정도전>에도 소개 됐던 일화죠.

 

공민왕 시절, '친명파' 길을 걷던 고려가 공민왕이 시해된 후, 갑자기 외교노선을 '친원파'로 바꿉니다.

친원파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납니다.

가만히 두고 볼 '명나라'가 아니죠~  이에 화가 난 명 '태조'는 고려의 사신을 옥에 가두고 유배를 보내는 일까지 발생하는데요.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킵니다.

 

풍전등화가 된 '고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그 누구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길 꺼려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명태조 생일 60일을 앞 두고 친원파는 사신으로 '정몽주'를 추천합니다.

그 당시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 가려면 대략 90일 정도 걸리는데... 생일 60일을 앞 두고 명으로 떠나게 됐으니~

생일날에 도착하기엔 어림도 없죠.

 

이건 누가 봐도 '친원파' 쪽에서 눈에 가시같은 '정몽주'를 없애고자 하는 계략이었는데요.

 

그런데 이 사건으로 정치판이 뒤집힙니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과 함께 밤낮 달려 명 태조의 생일 날에 무사히 축하문을 전하고 밀린 조공도 면제받으며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켜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요. 이 일로 '정몽주'의 기반이 단단해집니다. 더불어 '정도전' 역시... 정치 판에 다시 들어가게 되죠.

 

역사를 보면 늘~~ 그렇듯, 기회는 위기 속에 찾아 오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찾아 온 순간을 어떻게 살리는가에 따라 그 순간이 '위기'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네요.

그렇다면 그 후, '정몽주'의 삶은 탄탄대로 였을까요?

 

(정몽주의 서필 /이미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나라'의 기세가 치솟자 '명나라'는 고려에 요구하는 게 많아 집니다.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결국, 고려 정치권은 두 갈래로 나뉘어 집니다.

명의 뒤통수를 치자는 ^^* '최영 파'와 외교적으로 좋게 좋게~ 해결하자는 '이성계 파'! .

그리고 '친명파'의 정몽주는 '이성계'의 손을 잡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힘입어 '정몽주'는 권력을 잡고 개혁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요, 여기까진 모든 게 그의 뜻대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성계 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기 저기서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이 눈에 띄는 거죠. 여기서 '정몽주'는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고려를 개혁하자는 뜻은 같이 하였지만 그는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한 거죠.

'정몽주'가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 있는 거죠. 

 

'정몽주'와 '이성계'는 그렇게 서로 칼 끝을 겨누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 적극적으로 끼어든 사람이 더 있죠. 

바로, '정몽주'의 절친, '정도전'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입니다!

 

이 둘은 철저히 '이성계 파'의 핵심인물이죠.

'정몽주' vs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언뜻 봐도 힘의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당연, '정몽주'는 마음이 다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기회'든 잡아야 한 거죠.

 



 (정몽주, 태종 / 이미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성계'와 '정몽주'의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정몽주'의 정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따로 있죠.

두두두두두.... 바로 조선 제 3대 왕이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 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바로!!! 시조 중에서 으뜸으로 손 꼽히는 <하여가>와 <단심가> 때문이 아닐까요?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책략가 '정몽주'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정몽주'는 이 기회를 잡아 '이성계 파'를 제거하려고 하죠.

그리고 그 첫 번째가 '이성계 파'의 선두에 있는 '정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감금시키고 '조준', '남은' 등은 귀양을 보냅니다.

'이성계'의 양 날개를 자른 셈이죠. 그런데 그가 한 가지 놓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야심가 '이방원'입니다.

 

자신의 주변이 급하게 돌아간다는 걸 인지한 '이성계'는 아들의 제안에 따라 부상 상태로 집으로 돌아 옵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상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집으로 방문하죠.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날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슬쩍~ 떠 봅니다.

바로 시조 '하여가'로 말입니다.

 

 [何如歌 (하여가)] 이방원

 

 如此亦如何 如彼亦如何 (여차역여하 여피역여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성황당후원 퇴비역하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吾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오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죽지 않은들 어떠하리

 

 자... 그렇다면 '정몽주'의 답은 뭐였을까요?

[丹心歌 (단심가)] 정몽주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일백번갱사료)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백골위진토혼백유무야)

 백골이 진퇴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有改理歟(향주일편단심유개리여)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 있으랴

 

'정몽주'의 답변은 싸늘했습니다. 마음을 숨기면 좋을 법도 한데... 솔직하게 드러난 그의 본심에 '이방원' 은 그를 가만히 둬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조영규'를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의 뒤를 밟습니다.

그리고  정몽주를 습격하여 '선죽교' 위에서 피살하죠. 이때 정몽주의 피가 선죽교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다는 설이 있죠.

 

 (선죽교 /이미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죽교

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 하였으며,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고려 말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 4, 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 합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그런데 재밌는 점은 말입니다. '정몽주'의 이름이 '이방원'에 의해 널리 알려진다는 겁니다.

'정봉주'가 죽은 뒤 13년이 흐르고... '이방원'이 조선 제 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는 죽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란 게, 새 나라를 안전하게 다지기 위해선 명분이라는 게 필요 했고, 그 명분이 바로 '정몽주' 같은 충신이 조선 건국에 힘 썼다는 거죠. 

'이방원'은 '정몽주'라는 이름 세 글자를 극진히 대접하면 '충신'으로 명예를 안겨 줬죠.

 

역사 앞에선 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