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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 짠테크 도전기> 7편

내 인생 10년 계획 세우기



▶비로소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다


6편에서 살펴본 1년 부자 프로젝트를 통해 직장인 A 씨가 맞이하게 될 변화는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대출 상환액이 30만 원에서 110만 원으로 증가함에 따라 빚이 줄어드는 속도가 빨라지고, 더불어 최종 상환 시기가 앞당겨지게 될 것입니다. A 씨의 총대출액은 8,000만 원으로 기존과 같이 월 30만 원(연 360만 원)씩 상환할 경우 무려 22년이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상환액을 110만 원(연 1,320만 원)으로 증액하면 6년 안에 충분히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되죠. 22년과 6년,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둘째, 대출 규모가 줄어듦에 따라 내야 하는 이자 금액 또한 줄어듭니다. 현재 A씨는 월 25만 원 정도의 이자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월 110만 원씩 대출 원금을 상환하게 되면, 이에 맞춰 이자 금액도 줄어들게 되죠. 3년 후에는 이자 금액이 월 25만 원에서 절반가량(약 12만 원)으로 줄어들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줄어든 이자 금액 13만 원을 다시 대출원금 상환에 보탬으로써, 더 빨리 대출 금액을 갚아나갈 수 있겠죠. 빚 증가의 악순환이 아닌, 빚 감소의 선순환이 이뤄지는 셈이죠.

 


마지막 변화는 적응입니다. 지출을 줄여 살아보면 처음엔 그야말로 정신적 고통이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 시기에는 저 또한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지출을 줄이는 고통을 다른 재미로 전환할 수도 있답니다. 예를 들어 야식을 시키는 대신, 아빠가 나서보는 겁니다. 인터넷에서 야식 레시피를 찾아 간단한 요리에 도전해 보는 거죠. 그러면 가족들은 시식과 더불어 품평회를 하는 거고요.


생각을 바꾸면 행동도 달라집니다. 이런 변화가 가정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요. 행복이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있지만 대부분은 돈과 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돈 없이, 혹은 적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가치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바꾸어 줄 수 있기 때문이죠.



STEP 4. 10년 장기 경제플랜 수립하기


STEP 1~3에 이어 마지막 4단계는 10년 장기 경제플랜을 수립해 보는 것입니다. 아마 10년이라고 하면 난감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당장 1주일 뒤의 일도 예상하기 어려운데 10년이라니 까마득하죠. 그러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하게 1년 부자 프로젝트를 10번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0년 장기 경제플랜은 딱 한 번만 작성해보면 됩니다. 그 한 번이 정말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한 번이라도 작성해본 사람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10년 장기 경제플랜을 세우게 될 경우, 향후 자신의 유동자산, 부동산 규모뿐 아니라 부채와 그 상환 시기까지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내 미래의 경제플랜은 내가 스스로 관리하며 생활하게 되는 거죠. 기업들이 매년 연간 사업계획, 중장기 사업계획을 세우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아래의 표는 직장인 A씨의 10년 장기 경제플랜입니다. 2018년(43세)부터 2027년(52세)까지의 계획으로, 수입/지출 내역은 물론 그에 따른 자산과 부채의 변화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10년 인생 시나리오를 개략적이나마 세워야 합니다. A씨의 경우는 향후 10년간 현 직장에 계속 다니며 차장, 부장까지 승진하는 시나리오를 작성했습니다. 2021년에는 빚 8,000만 원을 모두 청산하고 2021년 이를 기념하는 가족 해외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2023년에는 드디어 자신의 보금자리를 장만할 계획까지 세웠는데요. A씨 가족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한 해가 되겠네요.


자, 그러면 지금부터 조금 자세히 A씨의 10년 장기 경제플랜을 살펴보겠습니다.

 


▲ [표1] 직장인 A 씨의 10년 장기 경제플랜


2018년 43세가 된 A씨는 2017년 말부터 시작된 1년 부자 프로젝트를 충실히 실행함으로써, 2018년 말 기준으로 자산은 2.4억 원으로 늘고 반대로 부채는 6,000만 원으로 줄게 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2020년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함으로써 수입이 6,300만 원(전년 대비 500만 원 증가)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A씨의 늘어난 수입을 지출이 아닌 대출상환에 추가하여 상환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썼다는 거죠. 그리하여 2019년 1,560만 원이던 상환액이 2020년에는 2,220만 원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결과 2021년에 모든 대출을 상환하며 마침내 빚의 늪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대출을 모두 갚은 기념으로 A씨 가족은 2022년 예산 500만 원으로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해인 2023년에는 드디어 보금자리를 마련할 계획을 세웁니다. 약 3.5억 원 정도를 들여 소형 아파트를 구매하려고 하는데, 청약저축 통장을 적극 활용하거나, 아니면 직접 지금 사는 주변의 아파트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때 대출은 1년 열심히 모으면 갚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금액, 4,000만 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출을 좀 더 하면 더 넓은 아파트를 살 수도 있지만, 넓은 집보다는 대출을 빨리 갚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죠. 계획대로만 실행된다면 2025년부터는 대출 제로인 완벽한 집주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최종 시점인 2027년 A씨의 자산은 약 5.1억 원으로 불어나게 될 겁니다. 고정자산인 아파트를 제외하더라도 유동자산 1.6억 원에 대출이 제로이기 때문에, 혹시나 직장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당장 돈 문제로 고생을 하진 않겠죠. 어떤가요? 처음에 불안했던 개인경제가 10년 후에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되어 있지 않나요? A씨 또한 매년 최선을 다해 생활하겠다며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저는 A씨에게 매년 1년 부자 프로젝트가 끝나면, 동시에 이 10년 장기플랜 또한 업데이트하라고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계획한 것과 실제를 비교하며 무엇이 잘 되었고, 또 어떤 것에 문제가 있었는지 분석해 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부분을 개선함으로써 다음 해에는 보다 나은 관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 [표2] 직장인 A 씨의 10년 장기 경제플랜 요약본


위의 표는 간단하게 재정리한 요약본입니다. 이 표를 인쇄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거나 혹은 다이어리 같은 곳에 넣어다니면 좋습니다. 필요할 때 수시로 체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자극이 되기도 하니까요. 



지금까지 생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4단계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 말씀 하나만 드리자면, 직장인 A씨가 한 것처럼 반드시 1~4단계를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이라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져 주지 못하는 개인 경제, 결국 스스로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해 주겠습니까? 그러니 힘들어도 꼼꼼하게 아내와 혹은 남편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하면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수월합니다. 그러니 오늘이라도 당장 실행계획을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개인경제는 결국 자신의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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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자처하는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평생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감내한 이유는 귀족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궁정 음악을 벗어난 자유 음악가로의 꿈


베토벤은 궁정악단에 종사하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태생적으로 궁정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혼란과 격동이 혼재하는 격변의 시대에 베토벤은 안정적인 궁정 음악가의 길을 거부하고, 자유 음악가1)의 길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당시 자유 음악가는 감당해야 할 경제적 리스크가 큰 탓에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자유음악가의 길을 시도한 선배 음악가들이 실패했기에 그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교회가 주는 고정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개최하여 이익을 얻는 길을 모색한 비발디2)나 모차르트가 끝내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을 모두가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1)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 비발디가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난 사례라면, 베토벤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로 자유음악가의 꿈을 실현한 고전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2) 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 이탈리아의 작곡자이자 연주자이면서 사제. 오페라 등 새로운 영역을 시도하며 음악 대중화에 힘썼지만,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흥행 요소’가 있는 음악 활동을 금지 당해 가난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것은 그 영광만큼의 커다란 고통과 고난이라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의 길을 택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랑스 혁명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로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군주제 아래서 군주, 귀족이 조직한 악단에서 급여를 받고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 내지 하인으로서의 음악가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모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기 시작한 상태에서 베토벤이 선택한 자유 음악가의 길은 고난이 예정된 미래나 다름없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난청 증세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고독한 운명을 이겨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토벤의 생애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더욱이 1809년이 되자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날로 위세를 떨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침략하면서 음식비가 매년 무려 50%씩이나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3)는 이와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 탄생한 곡입니다. 전쟁을 피해 귀족들 대부분이 빈을 떠났지만 베토벤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남아 창작에 집중했습니다. 자유 음악가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베토벤이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 그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전쟁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큰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악보 출판과 음악회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음악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끝없는 가난, 끊임없는 독립의 꿈


나폴레옹군의 빈 진주 당시 베토벤이 스스로 물가를 기록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은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해르텔’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구두 한 켤레를 30플로린, 코트 한 벌을 60~70플로린에 구입했는데, 1792년에는 6플로린이었던 구두를 1810년에는 30플로린에 구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서술을 보면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가 1792년에서 1810년 사이에 무려 여섯 배나 상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베토벤의 편지에는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1816년 람베르티 백작으로부터 임차한 주택으로 이사했는데, 임차료가 무려 500플로린에서 5,500플로린으로 10배 이상 올랐다.’는 푸념도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이 당시 빈의 피아노 제조업자 난네테 쉬트라이허에게 쓴 편지에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베토벤의 친구이자 악보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4)는 비교적 저렴한 빈 교외로 이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때 베토벤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벽지를 직접 도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4) 토비아스 하슬링거(Tobias Haslinger) : 음악상의 경영자이자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한 출판업자이다. 베토벤은 시외에 살며 빈 시내에 들를 때마다 하슬링거의 상점을 찾아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개인 사교장처럼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음악 도시 빈에서 명성을 얻은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생애 최초로 자신이 기획하여 수익을 갖는 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1800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극장에서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 음악가의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정신과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귀족의 후원에 기대지 않는 자유 음악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지만 악보 출판업의 부흥 등 주변 환경의 변화는 이 같은 베토벤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하고,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6~7개 유명 악보 출판사의 러브 콜을 받는 등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1807년에는 황제의 궁정 악장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전임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받았던 연봉의 두 배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황제 궁정악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작곡해야 하는 작품 중 오페라가 3번 이상 공연될 경우 세 번째 공연부터는 그 수익을 자신이 가져가고, 연 1회 개인적 음악회를 허용해 달라는 파격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물론 이 같은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베토벤이 세계 최고의 궁정악장 자리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고유의 예술 세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황제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자리도 베토벤이 가진 자유 음악가에 대한 꿈을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 혹은 소송


베토벤의 삶은 자유 음악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독립과 예술적 자유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806년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5) 공작이 오스트리아에 진격해 온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베토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토벤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원이 중단되면서 베토벤은 다시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5)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Karl von Lichnowsky) :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 모차르트에 이어 베토벤을 후원했다. 1800년부터 1806년까지 베토벤에게 매해 600플로린을 제공했으며,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걸작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베토벤이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를 알아차린 신생국 베스트팔리아 왕국의 왕이자 나폴레옹의 친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왕국의 수도 카셀의 궁정악장직을 베토벤에게 제의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연금보다 거의 네 배 이상의 거액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토벤을 빈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빈의 음악 애호가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 롭코비츠 공작이 각각 1,800플로린, 1,500플로린, 7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총 4,000플로린이 모였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가 약속한 연봉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기에 베토벤은 빈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사용하면서 통화 수단이던 플로린은 1811년에 가치가 폭락하였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약속받은 연금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루돌프 대공만이 간신히 연금을 지급하였고, 킨스키 공작은 파산 후 사망하였습니다. 롭코비츠 공작도 파산을 선언하며 연금의 지급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1813년 롭코비츠 공작과 1815년 킨스키 공작 가문에 각각 소송을 제기하여 밀린 연금을 받아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소송까지 해서 후원금을 강요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거나 베토벤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마치 6.25전쟁 직후와 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후원이 끊기자 베토벤에게 남은 수익 모델은 악보 출판업자를 통한 악보 판매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당시는 출판사에 작품을 넘기면 일회성으로 뭉칫돈을 받고 이후의 판매 독점권까지 양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과정에서 작품 번호6)를 잘 챙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출판을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잘 관리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인데요. 훗날의 일이지만 베토벤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악보 출판 시 작품 번호를 기준으로 저작권의 혜택을 받고 자유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저작권법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6) 작품 번호(Opus Number) : 오푸스(Opus)는 작품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보통 약자를 써 Op.1, Op.23 등으로 클래식 작품에 번호를 붙인다. 작품 번호는 17세기 후반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며 표지에 기재되기 시작한 방식이다. 베토벤은 스스로 자신의 음악 작품에 번호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로, 그의 사후 발견된 유작에는 ‘WoO. 번호’를 매긴다. ‘WoO.’는 ‘작품 번호 없음(Werks Ohne Opuszahl : Works without Opus number)’ 이라는 뜻이다.


당시 음악가들은 초판에 한해서만 출판업자로부터 판매 수입을 배당받고 재판부터는 배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색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먼저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정식 출판하기 전 6개월에서 12개월 사이의 독점 사용권을 귀족에게 판매했습니다. 사용권이 만료되고 나면 비로소 출판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작품을 여러 번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장엄 미사곡 Op.123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출판을 시도해 작품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먼저 독일 본의 출판업자 니콜라우스 폰 짐록에게 Op.123의 3년 독점 사용권을 판매했고, 친구이자 출판업자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라이프치히의 페터스 출판사,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타리아 출판사, 마인츠의 쇼트(Schott)7) 출판사, 총 네 곳에 3년 후 판매를 조건으로 같은 작품을 재판매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장엄 미사곡의 초판 첫 페이지에 자신의 서명을 쓴 악보를 총 28개 만들어 궁정악단에 판매하고,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10개국의 주문을 받아 추가 수입을 올렸습니다.


7) 쇼트(Shott) : 베토벤과 악보 출판계약을 맺었던 출판사로 1770년 창립해 250여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 출판 기업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는 물론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클래식 거장들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귀족에게는 일정 기간 독점 사용권 비용을 받고, 이후에 다시 다양한 루트의 출판을 모색하고 여기에 초판 사인본의 판매와 해외 판매까지, 베토벤은 단 한 작품으로 수많은 버전을 만들어 재판매하며 상당한 부가 수익을 거둬들였습니다. 음악사상 실질적으로 처음 자유 음악가의 길에 들어선 베토벤은 이처럼 경제적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고, 이러한 노력은 후배 음악가들이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데 훌륭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악보에 번호를 붙이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이것은 더 많은 출판 수익을 거두기 위해 찾아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번호에는 숫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조병선 청주대학교 법학과 교수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법학박사. 사법연수원, 법과대학원 등에서 ‘법과 음악’을 주제로 한 강의를 하고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 진행한 <클래식 법정>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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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이든의 삶은 고전 음악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평범한 축에 속합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하이든은 평온하다 못해 틀에 박힌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런 하이든이 말년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성공과 건강한 삶을 모두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 나오는 한 문장처럼 나이 듦은 흠이나 약점이 아닙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인생 2막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어줄 것입니다.



젊음에 대한 잘못된 집착부터 버려야


평균 수명이 40세에도 미치지 못했던 1732년에 태어난 하이든은 무려 77세까지 장수하며 천수를 누렸습니다. 30년 가까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에서 일한 끝에 은퇴하고 또 다른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고전 음악가들 가운데 하이든의 삶은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 중∙장년층에게 좀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하이든처럼 은퇴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막연하게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가 문제라고 정확히 말하기 어렵고 증상도 뚜렷하지 않지만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왜 사는가?’, ‘텅 비어 있고 껍데기만 있는 느낌’이라고 호소하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모호한 표현들이야말로 내면에서 오는 목소리입니다.

 



이제껏 앞만 보고 살아오며 자신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내면에서 이젠 스스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후반기에는 그동안 외면했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남의 시선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외적인 면에 집착하곤 합니다. 외모에 대한 집착은 젊음에 대한 집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은퇴 후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젊음에 대한 집착부터 버려야 합니다. 일단 건강과 외모가 예전 같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외모에 집착하고, 아무 근거 없이 건강 음식을 끊임없이 섭취하는 일부터 멈춰야 합니다. 최근에는 도가 지나쳐 성형 수술에 집착하며 젊은 사람과의 외모 경쟁에 힘을 쓰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나이에 맞지 않게 사는 일입니다. 진정한 젊음은 끊임없이 배우며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정신과 삶의 태도에 있는 것이지, 주름 없는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인정하되 우아함과 품위를 지키고, 경험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나이가 든다면 오래된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경험, 연륜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멋진 시니어가 될 것입니다. 흔히 중∙장년층의 어른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을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넘보고 이기려 드는 경쟁자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쟁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선배들의 경험과 지혜를 이어받아 미래를 개척할 사람입니다. 실제로 하이든은 말년에 이르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후배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기꺼이 자신의 무대를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오페라 대신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상연하라고 권유한 적도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가난한 후배 음악가를 위해 자신의 작품집에 지면을 내어주고 곡을 실어주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의 제자와 저작권 소송이 생겼을 때 법정에 출두해 작품의 주인은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그에게 곡을 헌정하고 말년에는 그의 후배들이 하이든의 곡으로 공연을 할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죽는 날까지 곡을 쓰고 공연을 했지만, 한 번도 젊은 음악가들을 자신과 경쟁하는 라이벌로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젊은 음악가들의 활동을 더 많이 도울수록 더 많은 이가 하이든의 음악을 연주하고 그의 음악을 더 널리 퍼트렸습니다. 하이든이 죽는 날까지 많은 이에게 큰 인물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일과 가족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의 삶을 찾아서


50대야말로 ‘진정한 나’의 삶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자녀들도 성장해 양육과 교육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과 가족을 떠나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누려본 적이 없기에 까닭 모를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모의 의견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가족 문화의 특성상 한국인은 부모가 정해준 길을 따르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는 스무 살 성인이 되어도 결혼 전까지는 자립을 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직장을 잡고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독립해도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느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신은 일을 그만두고 자녀들은 독립하는 시점이 됩니다. 은퇴한 분들의 사정은 엇비슷합니다. 일과 가정만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세상은 아주 낯선 곳입니다. 젊은 날의 대부분을 궁정악장으로 살아온 하이든도 은퇴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중∙장년층 가운데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하이든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삶은 누군가의 자식으로, 부모로, 배우자로 살아온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은퇴한 이후 하이든도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외국어도 못 하고, 해외여행을 해본 적도 없고, 음악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하지만 하이든의 놀라운 점은 낯설고 새로운 경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음악을 고집하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습니다. 말년에야 비로소 경험한 생애 최초의 영국 여행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흔히 50대 이후 일과 가족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서 오롯이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시간을 써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은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이제부터는 조금이나마 진정으로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시간의 일부, 내가 가진 돈의 일부를 써서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자극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감각이나 운동의 즐거움을 느껴보길 권합니다. 감각과 운동은 인간의 원초적인 기능이지만 이 즐거움은 매우 큰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귀가 즐겁고, 좋은 그림을 보면 눈이 즐거우며, 좋은 음식을 먹으면 입과 코가 즐겁습니다. 산책∙등산∙운동∙춤과 같은 활동을 통한 즐거움 또한 큰 기쁨을 줍니다. 세 번째로 지적인 활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어보라고 권합니다.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자료를 찾고 관련된 정보를 뇌에 입력하고 응용하는 것 또한 즐거운 일입니다. 어느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점점 많이 알게 되면 그 분야에서만큼은 고수가 됩니다. 요즘 말로 ‘덕후’가 되는 것이지요. 덕후가 되면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고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의 친교도 늘어나는 즐거움이 덤으로 생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밀, 몰입에서 찾다


스무 살이 넘어 하이든은 켈러라는 가발 제조업자의 둘째 딸 테레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테레제는 결국 수녀가 되어 하이든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테레제가 수녀원으로 간 뒤에도 그는 켈러가(家)를 드나들었는데요. 테레제의 언니 마리아와 28세 때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이든의 아내인 마리아 안나 켈러1)는 하이든보다 세 살 연상에 음악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이든의 악보를 그릇 받침이나 과자 포장지로 쓰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마는 컬페이퍼로도 썼다고 합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하이든이 음악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겠지만, 하이든을 음악에 몰입하게 만드는 한 가지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1)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 : 하이든의 아내. 1760년부터 40여 년을 하이든의 아내로 살았지만 슬하에 자식은 없다. 음악적 소양이 전혀 없고 호전적 성격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마리아는 유명인의 악처 리스트에 빠짐없이 오를 만큼 평판이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서로 맞지 않는 배우자를 만난 하이든과 마리아 모두 외롭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하이든은 성실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호기심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음악을 듣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작곡에 몰입해 즐거워했고 발전해가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너무 좋아서 깊이 빠지게 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때 우리는 흔히 ‘삼매경’에 빠졌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경험을 플로(Flow)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몰입’이라고 해석합니다. 플로의 원뜻은 ‘물의 흐름’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한번 흐름을 타면 역으로 거스르기가 어렵죠. 그래서 정말 좋은 것을 만나게 되면 헤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쭉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몰입을 뜻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2)에 의하면 이런 ‘몰입’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었거나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갑자기 몰입하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년의 하이든은 영국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3)를 처음 듣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고 하는데요. 그 음악에 매료돼 그날부터 <천지창조4)>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는 하이든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의 생전 마지막 생일날 공연된 것도 바로 이 곡입니다.


2)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 미국의 심리학자로서 ‘긍정심리학’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이다. 창의성과 관련된 몰입(Flow)의 개념은 많은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으며 현재는 미국 내 ‘삶의 질 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3) 오라토리오(Oratorio) : 17~18세기에 가장 성행했던 대규모의 종교적 극음악. 성서에 입각한 종교적인 내용을 지녔으며 동작이나 무대 장치 없이 합창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4) <천지창조> : 하이든이 3년에 걸쳐 완성한 오라토리오로 하이든의 대표작이다. 1798년 4월 초연한 이후 빈과 런던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회자되는 걸작으로 자리 잡았으며, 당시의 음악가를 비롯한 대중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7일간의 천지창조 서사에 곡을 붙인 것으로 창세기, 시편을 비롯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에서 가사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하이든은 음악에 몰입함으로써 괴로움을 잊었다고 하는데요. 말년에도 음악에 몰입해 충만한 삶을 누렸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지 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신동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서울의대, 서울대 외래 교수,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지음오페라단 이사, KBS 팟캐스트 <힐러들의 수다>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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