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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자유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자처하는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평생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감내한 이유는 귀족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궁정 음악을 벗어난 자유 음악가로의 꿈


베토벤은 궁정악단에 종사하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태생적으로 궁정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혼란과 격동이 혼재하는 격변의 시대에 베토벤은 안정적인 궁정 음악가의 길을 거부하고, 자유 음악가1)의 길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당시 자유 음악가는 감당해야 할 경제적 리스크가 큰 탓에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자유음악가의 길을 시도한 선배 음악가들이 실패했기에 그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교회가 주는 고정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개최하여 이익을 얻는 길을 모색한 비발디2)나 모차르트가 끝내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을 모두가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1)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 비발디가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난 사례라면, 베토벤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로 자유음악가의 꿈을 실현한 고전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2) 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 이탈리아의 작곡자이자 연주자이면서 사제. 오페라 등 새로운 영역을 시도하며 음악 대중화에 힘썼지만,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흥행 요소’가 있는 음악 활동을 금지 당해 가난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것은 그 영광만큼의 커다란 고통과 고난이라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의 길을 택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랑스 혁명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로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군주제 아래서 군주, 귀족이 조직한 악단에서 급여를 받고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 내지 하인으로서의 음악가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모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기 시작한 상태에서 베토벤이 선택한 자유 음악가의 길은 고난이 예정된 미래나 다름없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난청 증세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고독한 운명을 이겨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토벤의 생애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더욱이 1809년이 되자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날로 위세를 떨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침략하면서 음식비가 매년 무려 50%씩이나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3)는 이와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 탄생한 곡입니다. 전쟁을 피해 귀족들 대부분이 빈을 떠났지만 베토벤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남아 창작에 집중했습니다. 자유 음악가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베토벤이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 그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전쟁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큰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악보 출판과 음악회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음악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끝없는 가난, 끊임없는 독립의 꿈


나폴레옹군의 빈 진주 당시 베토벤이 스스로 물가를 기록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은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해르텔’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구두 한 켤레를 30플로린, 코트 한 벌을 60~70플로린에 구입했는데, 1792년에는 6플로린이었던 구두를 1810년에는 30플로린에 구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서술을 보면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가 1792년에서 1810년 사이에 무려 여섯 배나 상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베토벤의 편지에는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1816년 람베르티 백작으로부터 임차한 주택으로 이사했는데, 임차료가 무려 500플로린에서 5,500플로린으로 10배 이상 올랐다.’는 푸념도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이 당시 빈의 피아노 제조업자 난네테 쉬트라이허에게 쓴 편지에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베토벤의 친구이자 악보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4)는 비교적 저렴한 빈 교외로 이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때 베토벤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벽지를 직접 도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4) 토비아스 하슬링거(Tobias Haslinger) : 음악상의 경영자이자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한 출판업자이다. 베토벤은 시외에 살며 빈 시내에 들를 때마다 하슬링거의 상점을 찾아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개인 사교장처럼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음악 도시 빈에서 명성을 얻은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생애 최초로 자신이 기획하여 수익을 갖는 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1800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극장에서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 음악가의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정신과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귀족의 후원에 기대지 않는 자유 음악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지만 악보 출판업의 부흥 등 주변 환경의 변화는 이 같은 베토벤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하고,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6~7개 유명 악보 출판사의 러브 콜을 받는 등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1807년에는 황제의 궁정 악장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전임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받았던 연봉의 두 배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황제 궁정악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작곡해야 하는 작품 중 오페라가 3번 이상 공연될 경우 세 번째 공연부터는 그 수익을 자신이 가져가고, 연 1회 개인적 음악회를 허용해 달라는 파격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물론 이 같은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베토벤이 세계 최고의 궁정악장 자리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고유의 예술 세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황제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자리도 베토벤이 가진 자유 음악가에 대한 꿈을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 혹은 소송


베토벤의 삶은 자유 음악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독립과 예술적 자유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806년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5) 공작이 오스트리아에 진격해 온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베토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토벤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원이 중단되면서 베토벤은 다시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5)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Karl von Lichnowsky) :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 모차르트에 이어 베토벤을 후원했다. 1800년부터 1806년까지 베토벤에게 매해 600플로린을 제공했으며,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걸작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베토벤이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를 알아차린 신생국 베스트팔리아 왕국의 왕이자 나폴레옹의 친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왕국의 수도 카셀의 궁정악장직을 베토벤에게 제의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연금보다 거의 네 배 이상의 거액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토벤을 빈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빈의 음악 애호가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 롭코비츠 공작이 각각 1,800플로린, 1,500플로린, 7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총 4,000플로린이 모였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가 약속한 연봉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기에 베토벤은 빈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사용하면서 통화 수단이던 플로린은 1811년에 가치가 폭락하였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약속받은 연금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루돌프 대공만이 간신히 연금을 지급하였고, 킨스키 공작은 파산 후 사망하였습니다. 롭코비츠 공작도 파산을 선언하며 연금의 지급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1813년 롭코비츠 공작과 1815년 킨스키 공작 가문에 각각 소송을 제기하여 밀린 연금을 받아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소송까지 해서 후원금을 강요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거나 베토벤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마치 6.25전쟁 직후와 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후원이 끊기자 베토벤에게 남은 수익 모델은 악보 출판업자를 통한 악보 판매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당시는 출판사에 작품을 넘기면 일회성으로 뭉칫돈을 받고 이후의 판매 독점권까지 양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과정에서 작품 번호6)를 잘 챙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출판을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잘 관리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인데요. 훗날의 일이지만 베토벤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악보 출판 시 작품 번호를 기준으로 저작권의 혜택을 받고 자유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저작권법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6) 작품 번호(Opus Number) : 오푸스(Opus)는 작품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보통 약자를 써 Op.1, Op.23 등으로 클래식 작품에 번호를 붙인다. 작품 번호는 17세기 후반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며 표지에 기재되기 시작한 방식이다. 베토벤은 스스로 자신의 음악 작품에 번호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로, 그의 사후 발견된 유작에는 ‘WoO. 번호’를 매긴다. ‘WoO.’는 ‘작품 번호 없음(Werks Ohne Opuszahl : Works without Opus number)’ 이라는 뜻이다.


당시 음악가들은 초판에 한해서만 출판업자로부터 판매 수입을 배당받고 재판부터는 배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색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먼저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정식 출판하기 전 6개월에서 12개월 사이의 독점 사용권을 귀족에게 판매했습니다. 사용권이 만료되고 나면 비로소 출판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작품을 여러 번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장엄 미사곡 Op.123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출판을 시도해 작품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먼저 독일 본의 출판업자 니콜라우스 폰 짐록에게 Op.123의 3년 독점 사용권을 판매했고, 친구이자 출판업자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라이프치히의 페터스 출판사,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타리아 출판사, 마인츠의 쇼트(Schott)7) 출판사, 총 네 곳에 3년 후 판매를 조건으로 같은 작품을 재판매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장엄 미사곡의 초판 첫 페이지에 자신의 서명을 쓴 악보를 총 28개 만들어 궁정악단에 판매하고,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10개국의 주문을 받아 추가 수입을 올렸습니다.


7) 쇼트(Shott) : 베토벤과 악보 출판계약을 맺었던 출판사로 1770년 창립해 250여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 출판 기업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는 물론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클래식 거장들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귀족에게는 일정 기간 독점 사용권 비용을 받고, 이후에 다시 다양한 루트의 출판을 모색하고 여기에 초판 사인본의 판매와 해외 판매까지, 베토벤은 단 한 작품으로 수많은 버전을 만들어 재판매하며 상당한 부가 수익을 거둬들였습니다. 음악사상 실질적으로 처음 자유 음악가의 길에 들어선 베토벤은 이처럼 경제적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고, 이러한 노력은 후배 음악가들이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데 훌륭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악보에 번호를 붙이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이것은 더 많은 출판 수익을 거두기 위해 찾아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번호에는 숫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조병선 청주대학교 법학과 교수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법학박사. 사법연수원, 법과대학원 등에서 ‘법과 음악’을 주제로 한 강의를 하고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 진행한 <클래식 법정>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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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의 몸은 그 자체로 악기이며, 악상(樂想)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건강, 신체적 특징,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몸의 이야기’는 고전 음악가들의 음악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사실이자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연주 여행으로 시달린 모차르트는 키가 150 센티미터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신에 곰보의 얼굴, 커다란 주먹코를 가진 볼품없는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음악에 몰입하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열등감에 시달린 ‘큰 코의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모차르트1)의 일곱 번째 아들로 1756 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손위 6 남매 중 네 번째 누이 난네를2)만 살아 있고 나머지 5 명은 유아 시절에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아 사망률이 40% 에 육박했다고 하니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1)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모차르트(Anna Maria Walburga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어머니로 결혼 이전의 성(姓)은 페르틀(Pertl)이다. 여러 번 아들 모차르트의 음악 여행에 동행했으며, 아들의 파리 원정에 함께하던 중 이국땅에서 열병으로 객사했다.


2) 난네를(Nannerl):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누나의 애칭. 본명은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로 모차르트와 함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피아노 연주자,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모차르트와 달리 80 세까지 장수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는 그를 30 대 후반에 일곱 번째 아이로 임신한 탓인지 다른 형제들의 임신 때보다 입덧이 대단히 심했다고 합니다. 레오폴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아내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를 썼는데, 그 덕분에 모차르트는 태아 때부터 아버지의 음악을 듣고 그 소리에 익숙해졌습니다. 모차르트는 매우 심한 난산 끝에 태어났으며, 또 모유가 나오지 않아 곡물 가루를 먹으면서 자라 영양실조로 갖은 질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몸의 기능도 좋지 않아 걷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정상아보다 두 배나 늦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 여섯 살 무렵부터 시작된 연주 여행은 한창 성장해야 할 모차르트의 건강과 발육 모두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연주 여행은 그렇지 않아도 발육 상태가 좋지 않던 모차르트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모차르트는 성인이 되어서도 키가 150 센티미터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신이었습니다. 여기에 천연두로 곰보가 된 얼굴에, 근시와 커다란 주먹코를 가진, 말하자면 추남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큰 코가 도드라져 보여서 ‘큰 코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행동 역시 일종의 강박신경증 증상 때문에 늘 불안정했습니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외모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그의 귀였습니다. 누가 봐도 모차르트의 왼쪽 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기형적인 생김새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왼쪽 귀는 특이하게도 귓불이 거의 없었으며, 귓구멍에도 소용돌이가 결여되어 귀 특유의 굴곡이 전혀 없는 평평한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기이한 귀였던 탓에 당시의 연구자들이 이를 스케치로 남겨둘 정도였습니다. 음악 신동, 천재로 유명한 모차르트였기에 그의 특이한 귀 모양은 더 많은 이목을 끌었던 모양입니다. 그 귀 때문이었을까요? 어려서부터 모차르트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불안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많았지만, 일단 음악만 들려오면 모든 감각 기능이 음악에 쏠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조차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음악에 대한 이와 같은 놀라운 집중력에 더해 세 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여, 다섯 살에는 미뉴에트와 콘체르토를 스스로 작곡했으며, 여덟 살 때 교향곡을 작곡했다 하니 ‘천재’라는 찬사로도 부족할 만큼 음악적으로 조숙했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천재성과는 반대로 외모는 열등감을 가질 만큼 볼품없었다고 하니 신은 공평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차르트가 유독 트럼펫과 플루트를 싫어한 이유


원래 어머니 배 안의 태아는 양수(羊水) 속에서 초고음(超高音)에 민감한 상태로 머뭅니다. 임신 6 개월이 된 태아는 8,000 헤르츠의 고주파 음까지 민감하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소리의 속도는 공기 중에서 1 초에 340 미터까지 퍼지는데, 물속에서는 그 같은 속도가 1,500 미터로 5 배나 빠르기 때문에 낮은 진동보다 높은 진동이 태아에게 잘 전달되는 것이죠. 이런 속성에 적응한 태아의 귀 상태를 보통 태내귀(胎內耳, 일명 원시귀)라고 하는데요. 때문에 분만 후 물 대신 공기가 고막에 닿아서 내는 기도음(氣道音)인 저음에 적응하려면 생후 수개월이 지나야 한다고 합니다. 태아는 고주파 음역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태인데, 점차 성장하면서 그보다 훨씬 낮은 음역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유독 모차르트의 경우 기형적인 귀의 형태로 추측했을 때 왼쪽 귀가 태내귀 상태 그대로 성인이 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차르트는 악기 중에서 트럼펫3) 소리에는 매우 예민하여 이 소리를 들으면 경련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쓰러지곤 했다고 합니다. 트럼펫은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키도 밸브도 없는 악기였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날카롭고 큰 소리를 내는 금관 악기였습니다. 소위 ‘내추럴 트럼펫’이라는 악기인데요. 인간의 호흡과 금속 사이의 마찰만을 이용하다 보니 소리가 아주 높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군대의 팡파르나 기상나팔로 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3) 트럼펫: 15 세기 이전에는 피스톤이나 밸브가 없는 형태로, 내추럴 트럼펫이라고 불리며 팡파르 등에 쓰였다. 그 후 밸브와 피스톤이 만들어져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어린 모차르트는 트럼펫 소리를 아주 싫어해서, 아버지의 친구가 코앞에서 이 악기를 불자 기절할 뻔했다고 합니다. 또 목관 악기인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날카로운 음색을 자랑하는 플루트를 유독 싫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네덜란드 출신의 플루트 주자 드 장의 의뢰를 받고 작곡을 해야 했을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내가 싫어하는 악기를 위해 곡을 써야만 할 때 저는 극도로 무력해집니다.”라는 호소가 담겨 있을 정도입니다. 


모차르트는 성인이 되어서도 트럼펫이나 플루트 소리가 마치 권총을 발사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불평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왼쪽 귀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한 아버지 레오폴트는 오히려 이를 교정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그런 악기들의 소리를 더 자주 듣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트럼펫과 플루트를 싫어하는 모차르트였지만 모든 악기가 동원되는 교향곡에서는 이 같은 선호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작곡한 교향곡 가운데 트럼펫 연주 부분을 자세히 들어보면 다른 악기를 뒷받침하는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차르트와 음악적으로 교류도 깊고 같이 합주하는 경우도 많았던 하이든도 트럼펫을 위한 곡이 없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이든은 64 세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유일한 트럼펫 협주곡이자 마지막 관현악곡을 작곡합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악기에 대한 취향도 비슷했기에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24 세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막역한 친구처럼 지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형의 귀가 불러온 천부적 재능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모차르트의 아이큐를 역산해 측정해보니, 최소 160 에서 220 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확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1 년 프랑스의 의사 알프레드 토마티스(Alfred A. Tomatis)는 모차르트의 이런 천재적 능력이 귀의 청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왜 모차르트?(PourquoiMozart?)>라는 저술에서 모차르트가 신동으로 불리며 어려서부터 작곡을 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 갖고 있던 태아 상태의 귀, 즉 태내귀를 생후에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사실 모차르트처럼 귓불도 귓바퀴도 없는 형태의 특이한 귀는 지금도 1,000 명 가운데 한 명꼴로 나타나는 기형인데요. 이런 귀를 ‘모차르트의 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기이하게 생긴 귀를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의 모든 초상화에 왼쪽 귀가 가발로 가려져 있거나 숨겨져 있는 이유입니다. 




태내귀에 가까운 모차르트의 귀는 소리에 아주 민감했는데, 이 같은 예민함이 음악에의 몰입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음악, 혹은 일반인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소리가 모차르트에게는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모차르트가 우주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지고 태어나, 천상의 선율을 지상의 음악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문학적 비유를 쓰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독특한 귀가 모차르트 고유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탄생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4)도 기형적인 귀를 가졌다고 하니, 모차르트가 이 같은 귀를 가지게 된 것에는 유전적 요인이 작용했음이 분명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어머니가 고령의 임신과 난산, 산후의 영양실조를 극복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모차르트가 신동이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임신 중의 온갖 괴로움을 잊기 위해 남편 레오폴트의 음악을 가까이함으로써 아들 모차르트는 출생 전부터 음악에 친숙해질 수 있었고, 태아 상태의 그 귀로 세상에 나와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원래 태아는 임신 3 주부터는 내이(內耳)가 생겨납니다. 소리를 듣는 데 이용되는 기관인 달팽이관의 분화는 임신 6 주 때부터 시작되어 임신 12 주에 이를 때쯤 거의 완성됩니다. 또한 태아는 임신 20주(임신 5개월)를 전후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고 그 자극이 뇌에까지 전달되면서 ‘청력’을 갖게 됩니다. 이 같은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모차르트의 재능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 이전에 어머니로부터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4) 프란츠 크사퍼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들로 아버지의 외형과 재능을 똑 닮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 세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는 살아생전 훌륭한 음악가로 상당한 명성을 누렸으나, 모차르트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늘 아버지와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음악의 교육과 훈련에 철두철미해 모차르트에게 매우 엄한 교사였다면, 연주 여행에 지친 어린 모차르트에게 위로가 되어준 존재는 어머니였습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1777년에 어머니와 단둘이서 연주 여행을 고집해 아버지 레오폴트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1778년까지 계속된 이 연주 여행에서 모차르트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그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들을 따라다니던 그녀는 객지에서나마 아들의 음악 속에 잠들 수 있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문국진 고려대학교 법의학 명예교수

대한민국 1호 법의학자로 대한민국과학문화상,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했다. <바흐의 두개골을 열다>, <미술과 범죄> 등 법의학으로 미술, 음악을 분석한 책을 다수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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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해답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18세기 유럽인에게 와인은 건강 음료였습니다. 베토벤의 할머니부터 아버지까지 집안 대대로 와인을 물처럼 마시곤 했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18세기 유럽에 버금갈 정도로 알코올에 관대한 대한민국. 베토벤의 이야기 속에는 한국인 특유의 음주 습관에 경종을 울릴 만한 성찰이 숨어 있습니다.


의학사에 ‘알코올 중독’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베토벤이 죽은 뒤 20여 년이 지난 1849년이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도 와인은 건강 음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후대인들이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베토벤이 안다면 무척이나 억울해하지 않을까요?



베토벤의 운명을 바꾼 할아버지의 부업


베토벤이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 음악가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교회나 궁정에 소속돼 활동하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분한 수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8세기의 평범한 음악가들은 여러 가지 부업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부업은 악보 출판이었습니다.

 

바흐 같은 음악가는 결혼식, 장례식 음악을 부업으로 삼다 보니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많아지면 수입이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베토벤의 조부이자 이름도 같았던 루트비히판 베토벤의 부업이 와인 판매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존경받는 궁정악장이자 베이스 가수였던 베토벤의 조부는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와인 판매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보다 일종의 재테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와인은 깨끗하지 못한 식수를 대신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생활에 밀착한 상품이었습니다. 다만 베토벤가(家)의 누구도 이 같은 부업이 비극의 씨앗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부업 때문에 베토벤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와인을 더 많이 마시고 소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베토벤의 할머니는 말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그 아들인 요한, 즉 베토벤의 아버지도 극심한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자신의 삶을 망가트렸습니다.


알코올 중독인 부모 혹은 조부모 아래서 성장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알코올 중독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은 대부분 연구에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상반된 의견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상관(相關) 관계와 인과(因果) 관계를 구분하고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음악 관련 책에서는 베토벤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일종의 가족력(家族歷)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알코올 중독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는 알코올 중독과 상관 관계는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전적 질환과 같은 인과 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베토벤이 알코올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와인을 많이 마셨다고는 하지만, 당시 와인은 지금으로 치면 조금 더 비싼 음료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의학사에서 알코올 의존성 때문에 생기는 건강 문제를 지적하고 ‘알코올 중독’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베토벤이 죽은 지 20여 년 후인 1849년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때도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만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19세기 말까지 와인이나 맥주, 사과주 등 발효주는 건강 음료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가(家)의 와인 사랑은 건강한 습관


베토벤이 살던 18세기에는 상하수도 시설1)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인성 (水因性) 전염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병을 한두 번씩 경험한 이도 많았습니다. 특히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들은 흔히 내이염, 중이염 등으로 청력이 손상되는 경우가 많았고 베토벤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 상하수도 시설: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술 발전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들을 대거 탄생시켰으나 동시에 공중위생 시설의 부족 등으로 인한 전염병의 확산에 기여했다. 특히 상하수도 시설의 부족은 이 같은 공중위생의 핵심적 문제였다. 독일은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출범과 함께 네덜란드인 기술자를 불러와 베를린과 포츠담에 운하와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었다.


 


이처럼 베토벤이 청력을 잃게 된 것은 장티푸스의 후유증이기도 하고, 더 근본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위생 환경이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18세기는 오스트리아 빈, 체코 프라하 같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 같은 전염병이 더 빨리, 더 많은 이에게 퍼져 피해가 컸습니다. 때문에 더러운 물 대신 와인을 마시는 일은 이 같은 수인성 전염병으로부터 건강을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베토벤이 와인에 친숙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이른 나이에 건강을 잃고 사망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베토벤가 사람들의 와인 사랑은 건강한 습관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인과 관계를 보다 세밀하게 살피다 보면 지금까지 고려되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제3의 요인이 진짜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관관계를 인과 관계로 착각하는 것은 단순히 관련되어 있는 두 대상을 어느 하나가 원인이고 다른 것은 결과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음악 관련 서적에서 베토벤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일종의 가족력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는 부분은 재고할 여지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알코올 중독은 유전적 질환과 인과 관계가 있다기보다 당시 수인성 전염병의 확산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 판단에 가깝습니다.


1인당 술 소비량 세계 13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18세기 유럽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술에 관대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럽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한 식수에 불안을 느껴 와인에 관대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에도 생각하지 못한 인과 관계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요?



아난다마이드와 한국인의 ‘아무거나’ 문화



한국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별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한참을 고민하고 메뉴에도 없는 추가 사항을 덧붙이는 외국인들에 비하면 주문도 간단하고 특별히 자신의 취향에 따라 이런저런 요구를 더하는 법도 없습니다. ‘아무거나’라는 주문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죠.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남들의 선택을 따라 하거나, 아예 자신의 취향을 생각해본 적도 없이 ‘몰취향’으로 살아갑니다. 비단 음식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죠. 음식뿐 아니라 옷, 선호하는 브랜드나 삶의 방식에서도 자신만의 개성보다는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을 더 우선시합니다.


반면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 자신의 취향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행복감을 쉽게 느끼고 뇌에서는 아난다마이드2)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많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도박ㆍ약물ㆍ게임 등에 대해 중독자가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 많습니다. 행복한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만 끊임없이 집착하고 몰두할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피하고 막아야 하는 것에 관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무엇을 싫어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짧은 시간에도 굉장히 많은 대답을 하지만 ‘무엇을 좋아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리면서 ‘그저 아무거나’라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잘 모른다는 방증입니다.


2) 아난다마이드 (Anandamide): ‘행복’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인 ‘아난다’에서 따온 신경 전달 물질.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화학 물질로 몸속 마리화나, 내인성 모르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분비됐다가 금세 분해되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 성분이 잘 분비되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시름을 잠시 피하게 만들어주는 혹은 외면하게 만들어주는 불안 완화제, 즉 술에 몰입하기 쉬운 성격으로 살아갑니다. 외국 심리학자들이 흔히 “한국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시면서 화내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움을 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고 말합니다. 술이라는 도구가 행복이나 기쁨 촉진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만큼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술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일한 진정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들여다보면 술에 관대하기보다 술 이외의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는 법


베토벤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사가들이 묘사한 베토벤을 살펴보면 스승ㆍ연인ㆍ가족 누구와도 관계 맺기에 미숙하고, 쉽게 불화했으며, 음악 이외에는 다른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즉 중독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었던 것이죠. 

 



결국 중독이란 만성적 습관이 만들어내는 부정적 결과입니다. 특정 습관이 지속되어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가 되고, 결국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 결과를 우리가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독의 원인은 습관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특히 음주에 빠진 사람들이 가진 편견이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이 나쁜 습관을 없앨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의지만으로 나쁜 습관, 즉 중독을 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로이 보마이스터3) 교수에 의하면 나쁜 관행이나 습관을 의지력으로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무모하면서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곤해서 의지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 평소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3) 로이 보마이스터(Roy Baumeister):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 특히 그는 관행이나 습관을 의지력으로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역설하는 심리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자아고갈(Ego Depletion)’은 사람이 억지로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채찍질하면 이후 다른 상황에서 자제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거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중독을 만드는 나쁜 습관을 억제하려고만 한다면 결국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특히 그 사람의 의지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그 실패의 가능성은 극대화됩니다. 나쁜 습관은 다른 좋은 습관으로 덮어씌워야 없어집니다. 여행, 대화, 좋은 사람들과 맛난 음식 먹기 등 좋은 습관들을 만들어 대체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수많은 좋은 것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국내에 드문 인지심리학 전문가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 Austin 심리학 박사,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 한국음악지각인지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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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권다현이 추천하는

해변 도시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시원스레 펼쳐진 모래사장과 끝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바다, 기운차게 철썩이는 파도는 언제든 마음속 고민이나 묵은 감정의 흔적들을 훌훌 털어버리기에 좋은 공간이다. 이 같은 해변을 끼고 자리한 도시 중에는 자유로운 정신과 풍성한 예술적 감성, 독특한 낭만을 간직한 매력적인 여행지들이 가득하다. 올여름 당신의 눈과 마음을 설레게 할 아름다운 해변 도시들을 골라서 소개한다.



문학과 커피의 도시, 강릉


▲허난설헌생가

 

강릉을 대표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을 떠올리겠지만, 조선 중기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작품으로 당대 양반사회를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던 허균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에 탁월한 문장가였다. 어릴 때부터 그 재주가 뛰어나 <성호사설>을 썼던 이익도 "기억력이 슬기로운 사람으로 근세의 허균을 최고라 하니 그는 눈에 한 번 거치기만 하면 문득 알아냈다"고 전했다. 



▲허난설헌생가

 

이처럼 허균은 스스로 양반사회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움켜쥘 수 있었음에도, 오직 두려워할 것은 백성뿐이라며 <홍길동전>과 같은 반항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정치적으로도 '조선 최고의 아웃사이더'로 불릴 만큼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망설임이 없어 결국 51세에 모반자로 몰려 처형당한다. 



▲허난설헌생가

 

순탄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누이인 허난설헌에게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어릴 때부터 남자형제들과 나란히 글을 배우고 시와 그림에서 뛰어난 재주를 드러냈던 그녀는 전형적인 가부장 남편과 여성의 사회진출에 유난히 혹독했던 유교사회에 가로막혀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남동생 허균이 누이의 작품들을 엮어서 낸 <난설헌집>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중국과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문인으로서 재평가된다. 여행자들에게 초당두부로 더 많이 알려진 초당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이 살았던 생가가 남아있어 이들 남매의 불운했던 삶을 돌아볼 수 있다.



▲안목 커피거리에 위치한 로스터리카페

 

초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목해변에는 아름다운 바다를 품은 은은한 커피향을 즐겨볼 수 있는 카페거리가 조성돼 있다. 카페 대부분이 직접 로스팅을 하는 로스터리카페들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원두와 맛을 즐겨볼 수 있어 커피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무엇보다 강릉의 짙푸른 앞바다를 끼고 자리해 잠시 생각을 멈추고 여유롭게 쉬어가기에 그만이다.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도시, 통영


▲청마문학관

 

그리스신화에서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등장하는 뮤즈(Muse)는 흔히 시인이나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로 묘사된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과 <깃발>로 잘 알려진 시인 유치환, 로맨틱한 <꽃>의 시인 김춘수 등에겐 통영이 그와 같은 뮤즈였다. 푸른 바다와 그림처럼 떠 있는 작은 섬들, 생의 에너지로 가득한 항구는 이들에게 늘 아름답고 귀한 영감이 돼 주었다. 이들의 손에서 음악과 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 통영을 더듬어 걷다 보면 누구나 이토록 낭만적인 통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청마문학관

 

망일봉 기슭에 자리한 청마문학관에 들어서면 전면을 가득 채운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통영문화협회’ 회원들로 윤이상과 유치환, 김춘수를 비롯해 화가 전혁림과 시조시인 김상옥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이 모임에 속했다. 서울도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이뤄진 예술가모임이라고 하기엔 그 면면이 무척 화려하다. 멋스러운 중절모를 눌러쓴 김춘수와 멀끔한 양복 차림의 윤이상, 검은색 뿔테안경을 쓴 유치환, 날렵한 턱선이 인상적인 전혁림 등이 한 장의 사진에 함께 찍힌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윤이상공원

 

도천동에 자리한 윤이상기념공원에는 윤이상이 직접 적은 악보를 비롯해 그가 독일 유학시절부터 사용했던 바이올린과 여권 등 다수의 유품, 독일문화원이 수여한 괴테메달 등이 전시돼 있다. 이곳 통영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윤이상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고향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수십 곡의 교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지금도 공원에선 윤이상의 음악을 주제로 한 작은 음악회가 수시로 열려 음악도시 통영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김춘수유품전시관

 

충무교를 건너면 멀리 통영항이 바라보이는 바닷가 한편에 김춘수유품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평생 "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며 고향인 통영 앞바다가 자신의 시의 ‘뉘앙스’가 되었다고 고백할 만큼 그의 통영 사랑은 남달랐다. 



▲전혁림미술관


김춘수유품전시관에서 걸어서 15분 남짓이면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함께 통영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또 한 명의 예술가, 전혁림의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바다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시시각각 바뀌는 통영 앞바다의 풍부한 색채를 화폭으로 옮기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가 직접 그린 타일로 외벽을 꾸민 독특한 미술관은 이국적인 분위기와 그 안에서 만나는 특별한 작품들로 여행자의 발길을 끌어모은다. 



▲박경리기념관


 

산양읍으로 넘어가면 통영이 낳은 위대한 작가 박경리의 기념관이 반겨준다. 그의 작품 속에서 통영은 늘 주요한 배경이 됐고, 대표작 <김약국의 딸들>에선 아예 통영의 시내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기도 한다. 기념관 뒤편에는 그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단출한 묘소를 등지고 서면 드넓은 통영의 짙푸른 바다가 가슴으로 달려와 안긴다. 그녀가 ‘어머니의 태’와 같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고향 땅, 통영이다.



이국적인 야경의 도시, 부산


▲더베이

 

최근 부산은 홍콩이나 싱가포르 못지않은 이국적인 야경으로 여행자들을 유혹하는데, 그 대표적인 포인트를 꼽으라면 해운대에 자리한 ‘더베이101’과 황령산 봉수대다. 해운대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더베이101은 요트클럽을 비롯해 감각적인 펍레스토랑과 카페, 복합전시문화공간이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더베이


특히 어둠이 내린 후 마린시티의 화려한 야경이 절정에 달하면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만큼 북적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마린시티의 빌딩숲은 마치 SF영화에 등장하는 미래도시처럼 낯설고 웅장한 느낌이다. 요트클럽에 정박한 하얀색 요트 때문에 이국적인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다. 



▲황령산에서 바라본 야경


부산진구와 남구, 수영구의 경계를 이루는 황령산은 조선시대 봉수대가 설치될 만큼 군사상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이곳 봉수대에서는 매년 산신제와 더불어 봉화를 재현해 색다른 볼거리가 된다. 높이 427m의 황령산은 산세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라 인근 주민들이 산책 삼아 즐겨 찾는데, 특히 이곳 정상에서 바라보는 부산 시내의 조망이 빼어나 밤이면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가 좋다. 



▲황령산에서 바라본 야경


봉수대를 중심으로 사방이 탁 트여 시원스레 부산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왼쪽으로는 쭉 뻗은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화려한 야경이, 정면으로는 분주히 배가 드나드는 부산항의 밤 풍경이, 오른쪽으로는 서면의 눈부신 도심 야경이 펼쳐져 그야말로 부산 최고의 야경명소로 꼽힐 만 하다.



▲초량 이바구길에 위치한 카페


부산이란 도시의 정체성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을 찾는다면 단연 산복도로가 아닐까 싶다. 서울에 이어 제2의 근대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서면을 중심으로 시내 둘레를 휘감은 형태로 개발된 산복도로는 부산의 과거와 현재, 삶과 도심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빚어낸다. 



▲초량 이바구길


‘초량 이바구길’은 이 같은 산복도로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코스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이었던 옛 백제병원을 시작으로 초량동의 옛 모습을 담은 담장갤러리를 지나면 아찔한 경사의 168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단에 올라서면 멀리 부산항을 배경으로 도심과 주택가가 나란히 붙은 산복도로의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김민부전망대로 이름 붙은 이곳엔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돼 있어 잠시 숨을 고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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