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0년. 전라남도 영암에 들어선 ‘코리아 인터내셔널서킷’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모터스포츠 구경이 이런 모습일까요. 비가 와서 추적거리는 서킷에는 유모차를 탄 어린아이들부터 팔순의 노인까지 그야말로 온 세대가 모여들었습니다. 관람객의 모습만 본다면 이곳이 서킷인지 지역 축제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대대적인 홍보로 큰 기대를 모았던 국내 최초의 F1 결승 경기는 비 오는 날씨 탓에 세이프티카가 연발 앞장서면서 시원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이프티카로 등장한 메르세데스-벤츠의 SLS만 신나게 홍보를 한 셈이 됐습니다.




▲ 국내에서 주변 환경이 가장 좋은 서킷으로 꼽히는 강원도 인제의 서킷



어찌 됐건 우리나라에도 F1 경기가 열릴 수 있는 서킷이 생겼고 상대적으로 큰 이벤트가 없었던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모셔온 양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영암의 코리아 인터내셔널서킷은 2013년을 끝으로 F1 경기를 유치하지 못했고 지금은 국내 일부 대회와 자동차 브랜드의 시험장으로 혹은 자동차 동호인들이 모여 달리는 공간이 됐습니다. 모터스포츠에서 서킷은 절대적인 필수요소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독립 서킷을 만든 이유가 단순히 모터스포츠만을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서킷 ‘뉘르부르크링’은 어떤 곳?


자동차 경기를 치렀던 세계의 유명 서킷들의 운명은 앞서 얘기한 영암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자동차의 전성기에 크고 길었던 서킷은 지역의 쇠락 혹은 전쟁 또는 경제적 이유로 문을 닫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우리가 이름 한 번은 들었을, 혹은 자동차 뒤에 붙인 스티커로 기억할 독일 ‘뉘르부르크링’도 마찬가지입니다.



▲ 1930년 뉘르부르크링 탄생에 역할을 했던 ADAC 아이펠레넨 경주의 포스터 

/ 1930년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리는 경기를 홍보하는 포스터



뉘르부르크링은 현재 20.832km의 북쪽 구간을 서킷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독일어로 ‘노르트슐라이페(Nordschleief)’라고 부릅니다. 이곳 역시 처음 지어질 때는 정부의 정책이 한몫했습니다. 1920년대 독일에서는 산길을 달리는 레이스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도로였기에 아찔한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실업자 구제 대책의 하나로로 서킷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174개의 코너를 가진 총 길이 28.265km의 서킷을 완공했습니다. 이후 자잘한 코너를 포함해 181개로 바뀌었고 지금은 이 서킷 가운데 약 21km (서울톨게이트에서 동탄 IC 부근 정도의 거리)의 구간을 서킷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1954년 유럽그랑프리에서 뉘르부르크링을 달리는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메르세데스-벤츠 W196 모노포스토



뉘르부르크링 역시 역사적 사건에 따라 코스가 바뀌었습니다. 특히, 남쪽 구간은 인근에 주택이 있고 일반도로도 서킷에 포함해 사용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잠정 폐쇄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 서킷에서 얼마나 차들이 빨리 달리는지 느껴보려고 경부고속도로에서 거리가 비슷한 구간을 예로 들었습니다. 서울톨게이트를 출발해 직선 구간으로 동탄 IC까지 달리면 대략 뉘르부르크링과 비슷한 거리인데요. 네비게이션 상으로는 약 13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물론 규정 속도를 지킨 결과입니다.




▲ 독일 뉘르부르크링 최고 기록을 갖고 있는 멕라렌 P1 LM




▲ 지난 5월 뉘르부르크링 최단시간 기록을 세운 멕라렌 P1 LM의 주행영상

ⓒ멕라렌


그렇다면 뉘르부르크링을 달린 차들은 어땠을까요. 같은 거리이긴 하지만 직선이 아닌 181개의 코너를 돌아야 하는데 이때의 최고 기록은 무려 1분 29초 468입니다. 일반 자동차는 아니고 F1 머신으로 2004년 미하엘 슈마허가 세운 기록입니다. 올해 5월 26일에는 맥라렌의 P1 LM이 6분 43초의 기록으로 가장 빠른 차가 됐습니다. 뉘르부르크링을 달려보시면 알겠지만 엄청난 코너와 앞이 보이지 않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 험난한 코스입니다. 그래서 ‘녹색 지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서킷용 차를 빌려주는 렌트포링의 스즈키 스위프트



뉘르부르크링은 우리나라에서 소위 자동차 마니아들이 성지처럼 여기지만 독일에서는 인근 도시에서 물어봐도 어디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쾰른에서 뉘르부르크링을 찾아가기 위해 몇몇 독일인에게 물어봤지만 어설픈 발음 때문인지 남부의 뉘른베르크를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어찌됐건 독일의 뉘르부르크링은 전 세계에서 알음알음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세계 자동차 회사들의 테스트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곳에 가면 서킷을 달리기 위한 차를 빌려주는 업체들도 있으니 독일 여행 중에 하루쯤 다녀올 만 합니다.




▲ 포르쉐 트랙데이 



▶서킷의 아버지 ‘헤르만 틸케’


전 세계의 서킷에 대해 찾아보면 한 독일인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헤르만 틸케’. 안 나오는 곳이 없는 이름입니다. 1954년 마지막 날 (12월 31일) 태어난 헤르만 틸케는 독일의 엔지니어이자 레이서입니다. 특히, 서킷 디자이너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서킷’을 디자인한 것은 물론이고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 지은 대부분의 F1 서킷은 모두 틸케의 디자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용인 에버랜드스피드웨이 역시 2011년 확장하면서 헤르만 틸케가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이외에도 말레이시아의 세팡을 비롯해 바레인, 상하이, 이스탄불, 베이징을 포함해 무려 28개에 이르는 서킷을 디자인했습니다. 이쯤 되면 전 세계의 서킷은 거의 모두 헤르만 틸케의 작품이라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의 서킷


사실 모터스포츠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는 1920년대 이전부터 서킷이 생겨났으니 우리나라보다는 반세기 이상 앞선 셈입니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 자동차 중흥기를 거쳐 대중화가 시작됐고 2000년대에는 수입차까지 활성화되면서 자동차와 관련한 문화로 레이싱이 등장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이 레이서로 출전해 흥행을 일으켰고 최근에는 국내 완성차에서도 모터스포츠에 관심을 두고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의외로 많은 서킷이 있습니다. 모두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모터스포츠의 불씨가 이곳을 중심으로 살아나길 기대합니다.


가장 큰 서킷은 역시 전라남도 영암의 코리아 인터내셔널서킷입니다. F1 경기를 유지했던 곳답게 5.615km의 길이에 18개의 코너를 갖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약 3km의 서킷을 공개해 일반인들이 취미로 주행하거나 대회가 열리는 곳입니다. 지금도 주말이면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영암 서킷을 내려가는 머신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 인제스피디움 전경


강원도 인제에도 서킷이 있습니다. 내린천에서 조금 들어간 산속에 위치한 서킷은 2013년 처음 개장했습니다. 호텔까지 함께 건설했습니다. 총 길이는 4.207km로 영암보다 조금 짧지만 19개의 코너와 급격한 고저 차에 이어지는 코너로 짜릿한 주행을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 용인스피드웨이를 달리는 렉서스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서킷은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입니다. 2.125km의 짧은 서킷이었지만 2011년 확장 공사를 시작해 총 길이를 4.5km로 늘렸습니다. 아직 일반인의 취미 주행은 불가능하지만, 모터스포츠를 유치하고 각 자동차 브랜드의 마케팅 행사장으로 대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가 열리기도 합니다.



▲ 인제스피디움 서킷 라이센스



대부분의 서킷은 주행 방법을 익히는 조건으로 라이센스를 발급합니다. 주로 해마다 갱신하는 라이센스는 10만원 ~ 20만원 정도 합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지정된 시간에 서킷에 들어가서 자신의 차로 달릴 수 있습니다. 물론 몇 바퀴 도는데 얼마 같은 방식으로 사용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고성능의 차를 타고 있다면 한 번쯤 도전할 만한 일입니다. 내 차의 성능이 얼마나 되는지 합법적으로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킷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보험처리가 안 됩니다. 이점은 주의하면서 극한의 달리기를 즐겨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 본 콘텐츠는 집필가의 의견으로, 삼성화재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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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의 리턴 매치


예 맞습니다. 요즘 가까운 미래의 자동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전기차. 우리가 이제 맞아들이려 하는 전기차가 사실은 이미 과거에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전기차가 내연기관자동차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되었고 자동차의 주류였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은 전기차의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창립자 가운데 한명인 칼 벤츠(Karl Benz)가 1885년에 만든 ‘파텐트 모터바겐 (Patent-Motorwagen)’을 세계 최초의 자동차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한 대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파텐트 모터바겐은 이름이 설명하듯이 동력 기관을 사용하여 달리도록 처음부터 고안되어 특허를 취득한 최초의 자동차를 뜻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 모델의 중요성을 표현한다면 ‘세계 최초로 내연기관을 사용하여 작동한 오늘날의 자동차의 선조가 되는 자동차’가 되겠습니다. 


제가 세계 최초의 자동차라고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내연기관이 아닌 다른 동력 기관을 사용한 자동차들이 이 파텐트 모터바겐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120년이나 앞선 1769년에 프랑스의 니콜라스 조셉 퀴뇨(Nicolas-Joseph Cugnot)가 프랑스군이 대포를 견인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증기 자동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차, 즉 자동차의 시효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전기차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이 배터리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최초의 전기차를 만든 것이 1830년대니까 파텐트 모터바겐보다 대략 50년이나 앞선 셈입니다. 단, 이 최초의 전기차는 한 번 방전되면 다시 사용할 수 없는 배터리를 사용했다는 점이 한계였습니다. 

즉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갖고 노는 장난감 같은 존재였고 아직은 본격적인 교통수단이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충전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2차 전지가 1859년에 발명되자 비로소 전기차가 쓸모 있는 교통수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요즘의 순수 전기차와 기본적으로 같은 방식의 충전식 전기차가 등장한 것은 파텐트 모터바겐보다 2년 늦은 1887년 이었습니다. 미국인 화학자 윌리엄 모리슨(William Morrison)이 만든 이 충전식 전기차는 1888년 그가 살던 아이오와 주 데스 모이네스에서 열린 퍼레이드에서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였습니다. 1890년 그는 4마력 모터와 24 배터리 셀을 갖춘 신형 모델로 특허를 출원합니다. 이 모델은 최고 속도가 시속 약 20km, 1회 충전으로 무려 100마일, 즉 160km 이상도 달릴 수 있는 본격적인 모델이었고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서 스터지스(Sturgis)와 손잡고 만든 새로운 모델을 전시하여 전기차와 배터리의 실용성을 홍보하였습니다. 모리슨의 전기차는 이후 전기차가 20세기 초의 대세가 되는 데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시속 100km의 벽을 처음으로 허문 자동차도 전기차였습니다. 초기의 자동차가 사람이 걷는 속도인 시속 4km, 칼 벤츠의 파텐트 모터바겐이 시속10km, 그리고 모리슨의 전기차도 사람이 빠르게 달리면 잡을 수 있는 시속 20km 정도였고 당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던 말도 평균 시속 50km, 최고 속도 80km/h 전후였습니다.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들의 극소수만이 유일하게 시속 100km의 벽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포장 도로를 흙먼지 가득 일으키며 시속 100km로 달리는 자동차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시속 100km를 최초로 기록한 자동차는 프랑스의 ‘La Jamais Contente’입니다. 프랑스어라서 발음은 힘들지만 뜻은 아주 명쾌합니다. 그 뜻은 바로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Never satisfied)’. 두 개의 68마력짜리 모터로 바퀴를 직접 구동하는 어뢰를 닮은 유선형 차체가 인상적인 이 전기차는 20세기가 오기 직전인 1899년 4월 29일 파리 근교에서 사상 최초로 시속 100km의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이것은 한 달 전에 가솔린 엔진을 단 자동차가 세운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기차의 우세를 확고히 한 전기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도 전기차의 우세는 이어집니다. 그 이유는 첫째 전기차의 단순한 구조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기차는 엔진처럼 ‘시동’이라는 개념이 없고 전기를 모터에 전달하면 바퀴가 굴러갑니다. 따라서 엔진은 시동되어 있지만 달리지 않을 때를 위하여 엔진과 바퀴의 연결을 끊어주는 클러치가 필요 없습니다. 또한 초창기의 엔진은 회전수에 따라 점화 시기를 운전자가 직접 조절해야 하는 등 조작하기가 매우 복잡합니다. 걸핏하면 망가지고 사람이 기름범벅이 되기 십상인 엔진의 신뢰성도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시동입니다. 당시의 엔진에는 지금과 같은 전기식 시동 모터가 없고 사람이 크랭크 축에 손잡이를 꽂아서 돌려서 시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지간한 남자에게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여러모로 엔진 자동차는 깔끔하고 조용한 전기차에 비하여 성가시고 불편한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당대의 발명왕이자 재산가였던 토머스 에디슨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전기차는 미래가 밝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기차가 1920년대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가격입니다. 지금의 전기차도 정부 보조금이 없으면 가격 경쟁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헨리 포드가 모델 T로 생산 라인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엔진 자동차는 품질은 향상되고 가격은 훨씬 저렴해졌습니다. 1912년 기준으로 전기차의 가격이 1750 달러였던 것에 비하여 포드 모델 T의 가격은 단 650 달러였습니다. 그리고 전기식 시동 모터가 발명되면서 엔진을 시동하는 것이 손쉬워졌습니다. 1회 충전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짧고 충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전기차의 한계가 더욱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휘발유도 구하기 쉬워졌습니다. 마침내 전기차는 실질적으로 퇴장합니다.


20세기의 시작을 희망차게 함께 했던 전기차가 20세기를 마무리하기 직전에 다시 돌아왔었습니다. 1996년에 만들어진 제너럴 모터스의 EV1이라는 전기차입니다. EV1은 배출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차를 의무적으로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캘리포니아 주의 환경보호법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전기차 판매의 사업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리스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던 시범 사업이었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었고 전기차가 실용적일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어가던 중, 1999년 제너럴 모터스는 EV1 전체를 수거하여 거의 대부분을 폐차함으로써 갑자기 종료되었습니다. 정유 업계의 로비설 등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인 ‘Who Killed the Electric Car?’가 제작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잊혀져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기차가 다시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듯합니다. 이전에는 신기한 장난감, 상대적으로 편리한 도구, 혹은 미래를 가늠하는 제한적 실험이었다면, 이번에 돌아온 전기차는 ‘달리는 스마트 폰’이라는 말이 설명하듯 IT와 자동차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일백년 만에 벌어지는 전기차의 리턴매치. 이번에는 결과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 본 콘텐츠는 집필가의 의견으로, 삼성화재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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