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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하이든은 100명이 넘는 제자를 길러냈지만, 정작 스스로는 이렇다 할 스승을 둔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키워낸 하이든이야말로 요즘 같은 평생 교육의 시대에 걸맞은 롤모델일 것입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음악을 갱신해나간 하이든만의 노하우는 무엇이었을까요?



즐기는 자(樂之者)의 음악이 가진 힘



‘지지자(知之者)는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요, 호지자(好之者)는 불여락지자(不如樂之者)니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널리 알려진 <논어(論語)>의 문구처럼 하이든이야말로 음악을 가장 자유롭게 즐긴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음악에는 특유의 활달함과 유연함이 녹아 있습니다. 하이든의 교향곡 <고별>1)이나 교향곡 <놀람>2)은 이 같은 그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곡입니다. 하이든의 고용주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여름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했는데, 후작을 따라간 하이든과 음악가 동료들은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1) 교향곡 <고별> : 하이든이 1772년 작곡한 제45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를 모두 마친 사람부터 한 사람씩 퇴장함으로써 사라지듯이 곡이 끝나는 이색적인 교향곡이다.


2) 교향곡 <놀람> : 북치기(Paukenschlag)라는 별칭을 가진 교향곡. 하이든이 1791년에 쓴 작품으로 제2장에서 별안간 팀파니가 곁든 포르티시모(ff: 가장 강하게)의 화음을 강하게 울려 붙은 별칭이다.


그런데 1772년 여름, 무슨 일인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후작이 돌아갈 기색을 보이지 않자 악사들의 불만은 턱밑에까지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이든은 이 같은 악단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교향곡 <고별>을 작곡했습니다.


교향곡 <고별>은 마지막 악장에 이르면 연주자들이 하나 둘씩 퇴장하는 형식의 곡입니다. 이 음악을 들은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마침내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렇게 긴 휴가를 끝내고 짐을 싸서 집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요. 자신의 교향곡에 연주자들의 고충을 담되 이것을 재치 있는 방법으로 전달한 하이든 특유의 유머가 후작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이든은 음악을 대할 때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태도가 그의 음악을 보다 창의적이고 유연한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배움이란 원래 골치 아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하이든이 음악에 대해 가졌던 태도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당시 음악을 주로 소비하던 사람들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음악은 귀족들이 사교 파티를 열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악단이 연주할 때 음악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장가 삼아 졸고 있는 청중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은 기지를 발휘해 이런 상황을 한순간에 뒤바꿔놓습니다. 교향곡 <놀람>은 조용한 2악장에서 갑자기 팀파니를 포함해 모든 악기가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냅니다. 당연히 졸음에 빠져 있던 수많은 청중은 기겁을 하며 잠에서 깼을 것입니다.




의외의 상황에 청중과 오케스트라 모두 함께 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미 상당한 유명세를 얻어 존경받고 있는 하이든이었지만, 그는 훈계하거나 불쾌해하기보다 음악으로 상황을 반전시켰습니다. 이처럼 하이든은 마치 음악이 곧 자신의 말인 것처럼 음악을 지혜롭게 활용하고 몰입함으로써, 자칫 심각하거나 불편한 상황에서도 부드럽고 유쾌하게 상황을 바꿔나갔습니다.


하이든의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은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본질적으로 매우 유연하고 열려 있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당대의 거장이라는 스스로의 지위를 강조하기보다 음악에 유머를 섞어 더 많은 흥미를 이끌어내고, 어떤 상황에서도 음악을 즐겼던 하이든의 태도는 그가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발견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이든은 즐거운 몰입과 경험을 바탕으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음악을 새롭게 갱신해나갔습니다. 흔히 내 운명의 주인은 나라고 하는데, 하이든의 인생 스토리에 꼭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하이든, 길거리 버스킹으로 음악을 배우다


지금이야 고전 음악이 멋진 공연장에서 듣는 격조 높은 문화 활동이지만, 하이든이 살던 시대의 고전 음악가들은 지금으로 치면 무명 인디 뮤지션보다 더 열악한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의 음악가라면 누구나 돈 많은 귀족에게 고용되어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평생을 지내는 것이 가장 바라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조금 대우가 낮은 교회의 성가대나 오페라 극장도 나쁘지 않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가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연회나 특별한 행사에 가끔씩 불려 가거나, 거리에서 연주를 해서 구걸하다시피 사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하이든 역시 평범한 음악가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고스란히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이든은 어린 나이에 친척의 손에 이끌려 부모 곁을 떠나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빈의 황실 교회인 성 슈테판 성당의 지휘자가 이 교회 성가대에 우연히 들렀다가 하이든의 목소리를 듣고는 빈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이든이 있었던 성 슈테판 성당 부속 소년 성가대는 오늘날 ‘세계 3대 소년합창단’으로 손꼽히는 빈소년합창단3)입니다. 하이든은 이처럼 각광받는 황실 교회의 성가대에 발탁되어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가톨릭 교회는 성가대에서 여성이 노래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변성기 전의 어린 소년들이 여성 성부를 노래했습니다.


3) 빈소년합창단 : 빈 궁정성당에 소속된 성가대로서 1498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칙령에 따라 조직되어 5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이든, 슈베르트 등이 소년 시절에 단원으로 활동했다.


 


성가대에서 뛰어난 음색으로 천상의 목소리를 자랑했던 하이든. 하지만 그는 파리넬리와 같은 유명한 카스트라토가 될 수 있는 길을 포기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길거리 연주자, 배고픈 작곡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때문에 변성기가 찾아오면 그곳을 떠나야 하는 불안한 현실이 하이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던 하이든에게 그곳에 남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습니다. 워낙 뛰어난 음악성과 목소리를 가졌기에 거세를 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남성 가수, 즉 카스트라토4)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하이든이 마음만 먹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작곡가가 아니라 파리넬리5)와 쌍벽을 이루었던 카스트라토 하이든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배고픔과 고난이 기다릴 것이 뻔한 작곡가와 안정적인 가수의 진로 가운데 작곡가의 길을 골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볼품없지만 자신의 음악성을 활짝 펼칠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한 셈인데요. 변성기가 되어 성가대에서 쫓겨난 하이든은 세레나데를 전문으로 하는 ‘가자’라는 길거리 연주단원으로 활동하며 혼자 작곡 공부를 하고 간간이 의뢰를 받아 곡을 만들면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4) 카스트라토(Castrato) : 카스트라토는 변성기가 되기 전에 거세하여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하는 남자 가수를 말한다. 여성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16~18세기 유럽에서 교회 음악이나 오페라에서 이 같은 카스트라토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5) 파리넬리(Farinelli) : 파리넬리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본명은 카를로 브로스키(Carlo Broschi)이다. 1720년에 정식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해 오페라 <아델라이데(Adelaide)>의 주역을 맡으면서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당시 길거리 공연에서는 일종의 민요를 자주 연주했는데, 훗날 하이든은 이때 친숙해진 헝가리 민요, 농부들의 축제 음악을 모티브로 한 교향곡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게다가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음악을 공부한 덕분인지 하이든은 가난한 후배 음악가를 극진히 대해주는 선배로 성장했습니다.



나의 스승은 나, 국민 음악가 하이든의 성장 비결



아마도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 가장 친숙한 하이든의 음악이라면 오래전 공중파 방송의 장수 프로그램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이었던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일 것입니다. 특히 하이든의 현악 4중주 <황제> 중 2악장은 한때 오스트리아의 국가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독일 국가의 선율이기도 합니다. 가사는 다르지만 개신교 교회의 찬송가 선율로도 사용되고 있어 교회를 다니는 분들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음악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이든은 당대에 ‘국민 음악가’라고 불러도 될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음악가로서의 위상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한참 앞질러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하이든 본인은 이런 사실을 별로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하이든은 길거리 공연 시절 이후에는 에스테르하지 궁에 속한 궁정악장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면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 음악가들 외에는 동시대 다른 음악가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립된 상황은 하이든에게 오히려 다양하고 모험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당시의 유행이나 다른 음악가들의 평가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영주는 내 모든 작업에 만족감을 표했다.

나는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았다.

나는 악단의 장으로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관찰할 수 있었다. 무엇이 감동을 유도하고,

무엇이 그 감동을 약화시키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보충하고, 잘라내고, 모험을 감행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내 주위에서는 아무도 내가 실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며,

나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나는 독창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하이든이 친구였던 마리안느 폰 켄징거(Marianne von Genzinger) 부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은 그 말뜻 그대로 교향곡이라는 전에 없던 악곡의 형식을 처음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주인공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꾸준히 작곡하면서 조금씩 그 틀을 가다듬어 마침내 교향곡 형식의 표본이 되는 확고한 기준을 마련했고, 그것이 하이든이 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입니다. 사실 하이든의 기여와 공헌은 교향곡뿐만 아니라 현악 4중주와 독주 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기악 양식의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교향곡의 아버지를 넘어 고전주의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외부의 평가나 시류에 휩쓸리기보다 오로지 자기 작업에만 몰두했던 하이든의 작업 방식이야말로 그를 교향곡의 아버지, 고전의 아버지, 국민 음악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30년 가까이 궁정에 갇혀 지낸 하이든은 화려한 사교계와도, 유행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 자신은 이런 환경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도 반항한 적도 없습니다.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만족스러웠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 교수

<SERI CEO_ ‘뮤직 인사이트’, ‘커피콘서트’> 등 고전 음악 인문학 강의의 1세대 강사.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오, 클래식>, <나를 꿈꾸게 하는 클래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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