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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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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계몽 군주들은 음악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생긴 음악당과 연주회는 새로운 시민 계급을 성장시켰습니다. 후배 음악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하이든의 행동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예술과 더불어 사회 개혁에 나선 18세기의 계몽 군주들


18세기까지 거의 모든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결국 실용 음악에 속했습니다. 예배의 경건함을 도모하거나 궁정의 연희를 흥겹게 하면서 귀족의 행사에 품격을 더하는 음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대의 작곡가 역시 대개 궁정 음악가1)이거나 교회 음악가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음악 담당 공무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 궁정 음악가 : 궁정 음악가는 안정적인 수익과 지위 때문에 대부분의 음악가가 선망하는 직업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 귀족의 취향에 복무하는 고리타분한 음악가로 폄훼되기도 했다. 18세기는 이와 같은 궁정 음악가에 대한 평가가 점차 바뀌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정치에 예속된 예술’로 좁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들이 지배하던 시절은 궁정 문화가 세속의 거의 모든 문화에 깊고 넓은 영향력을 펼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의 음악가들은 시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시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악가이자 이후 도래하게 될 시민 문화 시대를 예고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비발디와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있었기에 베토벤과 슈베르트2)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변화의 조짐은 18세기 중엽 이후 전개되었습니다. 계몽 군주, 즉 절대 권력을 지닌 군주지만 계몽주의 사상을 일정하게 받아들인 중북부 유럽의 군주들은 실력 있는 예술가를 두루 초빙하고 그들을 후원하여 궁정 문화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이 대표적입니다. 계몽 군주들과 각 지역의 귀족이나 중산계급들은 전문 음악당을 설치하고 근대적인 악단을 구성하였으며 능력 있는 작곡가를 지속적으로 후원했습니다. 파리에서는 1725년에 연속 공개 연주회가 열렸으며,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1781년에 열린 연주회는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그 장소가 지금도 유명한 게반트하우스3)입니다.


2)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 빈 고전파 이후 나타난 18~19세기 낭만주의 악파의 대표 주자로 음악의 선율에 낭만주의적 감성을 불어넣은 작곡가다.


3)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세계적인 콘서트 홀. 게반트하우스는 직물회관 또는 양복회관이라는 뜻으로, 1781년 라이프치히의 부유한 상인들이 악사를 고용, 음악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런던에서는 1762년 이후 연주회를 위한 협회가 공식적으로 창립되었으며 1771년 빈, 1790년 베를린 등 비슷한 시기에 이 같은 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히 예술가를 후원해 다양한 문화 활동이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특히 중북부 유럽의 계몽 군주와 각 지역 귀족들이 여러 사상과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이 새로운 사상과 예술로 하여금 지속적인 사회 개혁과 문화적 혁신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관습이나 양식에 의존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개혁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혁신적인 예술가들을 적극 초빙하여 거대한 시대적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하이든의 삶에는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변방 마을 로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느 음악가와 달리 하이든은 가난한 목수 부모 밑에서 컸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없었더라면 하이든은 도제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평생을 꼼꼼하고 성실한 목수로 살았을 것입니다.


계몽 군주 시대의 바흐와 시민 계급 시대의 베토벤을 이으라는 신의 계획이었을까요? 신은 그에게 풍부한 음악적 재능을 부여했습니다. 부모는 일찌감치 그의 음악적 능력을 알아보고 근처 마을인 하인부르크 학교 교장이자 성가대 지휘자인 친척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를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여섯 살 무렵 집을 떠난 하이든은 교회 성가대원이 되고 능력을 인정받아 빈으로 입성, 성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됩니다.



음악가를 지원하는 대신 저작권 등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다른 후원자들과 달리, 계몽 군주였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하이든의 창조적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후작이 하이든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지원했듯, 훗날 하이든도 후배들의 새로운 음악을 지원하고 격려했습니다.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로 길러낸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이든이 성장 과정에서 익힌 최고의 덕목은 주어진 여건에 충실하게 일하는 견실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6세 무렵 집을 떠나 하인부르크로 이주했을 때, 또 그곳에서 성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었을 때, 그리고 성년이 되어 음악가로서 직업을 얻고자 했을 때에도 그에게 요구되고 그가 가장 크게 발휘한 미덕은 성실한 직업적 태도였습니다. 때로는 일상 업무가 가혹했고 때로는 엄격한 신분 질서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이를 평생에 걸쳐 묵묵히 참으며 인내하였습니다.


전기(電氣)는 없었고 전례(典禮)는 많던 시대였습니다. 성스러운 종교 공간인 성당에서는 매일같이 미사가 올려졌고 세속의 최고 기구인 궁정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가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이 전례와 행사를 위해 매일 바쁘게 일을 했습니다. 음악가의 신분도 요리사∙마부∙정원사∙시종 등과 엇비슷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헝가리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에서 근무한 하이든은 숙명처럼 주어진 자신의 신분과 직위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궁정이나 귀족이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가는 음악가에게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고용주가 과거의 형식에 만족해 늘 비슷한 곡만 요구한다면 음악가는 평생 그 궁정에서 낡고 닳은 음악만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하이든을 고용한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계몽 군주였습니다. 빈에서 4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이젠슈타트의 대저택에서 이 후작은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향곡’이었습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걸출한 교향곡을 남겼음에도 이른바 ‘교향곡의 아버지’로 하이든이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양식을 작곡할 만한 비범한 능력이 있었고, 또 다행히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생애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생의 정점을 찍은 다음의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이든은 평생 하인 복장을 하고, 궁정악장으로서 충실히 복무했던 예술가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를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이후의 예술가들, 즉 보다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었던 시대의 음악가와 단순 비교해 궁정 예법과 신분 사회에 굴복한 예술가라는 식으로 폄하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의 불운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입니다.



시대의 징검다리를 자처한 하이든


하이든은 자기가 살던 시대에 주어진 관습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덧 자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활기차게 시작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새 시대의 개막에 동참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30년 가까이 봉직한 그는 1790년에 이윽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대저택을 나와서야 하이든은 자기의 이름이 유럽 각국에 펼쳐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그는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만년의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후배 작곡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이든은 단지 작곡 기법만 가르친 게 아니라 연금과 작품료를 털어 가난한 후배들을 경제적으로도 지원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제자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입니다.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천재 모차르트와 거침없이 시민 시대의 횃불을 들었던 베토벤이 더욱 돋보이도록 하이든이 두 사람과 교우한 것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그 시대를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저명한 선배의 추천을 받아야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하이든은 빈의 유력한 가문과 사교계에 두 사람을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교향곡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웅장한 작품을 쓰는 데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24세나 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일찌감치 간파하였습니다. 나이를 뛰어넘어 모차르트와 친구로 교류하며 현악 4중주 기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모차르트도 하이든의 배려에 감복해 6곡의 현악 4중주를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 역시 하이든의 만년의 대작, <천지창조>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808년,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기념하는 빈 연주회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을 때, 병상의 그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하자 그동안 그와 불편한 관계4)였던 베토벤은 공연이 끝난 후 무릎을 꿇고 하이든의 손에 존경과 화해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이미 세상은 베토벤의 시대였고 그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천지를 격동하던 때였지만 베토벤은 그를 바흐, 헨델 그리고 모차르트에 비견될 존재로 인정하였습니다.


4) 불편한 관계 :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처음 구상했던 1801년만 해도 베토벤은 하이든을 싫어했으나, 이 곡이 완성된 1808년 무렵에는 둘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1809년, 빈은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면서도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집 근처만은 포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 군인들을 보내 경비를 서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군인들이 경의를 표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누구보다 근면하게 살아냈고 훗날의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하이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예우였습니다.


하이든은 안정적인 직업을 바탕으로 상당한 경제적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젊은 후배 음악가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하이든이 자신의 영광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강연을 중심으로 고전 음악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 평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클래식, 시대를 듣다> 등 10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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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인에게 와인은 건강 음료였습니다. 베토벤의 할머니부터 아버지까지 집안 대대로 와인을 물처럼 마시곤 했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18세기 유럽에 버금갈 정도로 알코올에 관대한 대한민국. 베토벤의 이야기 속에는 한국인 특유의 음주 습관에 경종을 울릴 만한 성찰이 숨어 있습니다.


의학사에 ‘알코올 중독’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베토벤이 죽은 뒤 20여 년이 지난 1849년이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도 와인은 건강 음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후대인들이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베토벤이 안다면 무척이나 억울해하지 않을까요?



베토벤의 운명을 바꾼 할아버지의 부업


베토벤이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 음악가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교회나 궁정에 소속돼 활동하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분한 수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8세기의 평범한 음악가들은 여러 가지 부업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부업은 악보 출판이었습니다.

 

바흐 같은 음악가는 결혼식, 장례식 음악을 부업으로 삼다 보니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많아지면 수입이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베토벤의 조부이자 이름도 같았던 루트비히판 베토벤의 부업이 와인 판매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존경받는 궁정악장이자 베이스 가수였던 베토벤의 조부는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와인 판매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보다 일종의 재테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와인은 깨끗하지 못한 식수를 대신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생활에 밀착한 상품이었습니다. 다만 베토벤가(家)의 누구도 이 같은 부업이 비극의 씨앗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부업 때문에 베토벤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와인을 더 많이 마시고 소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베토벤의 할머니는 말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그 아들인 요한, 즉 베토벤의 아버지도 극심한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자신의 삶을 망가트렸습니다.


알코올 중독인 부모 혹은 조부모 아래서 성장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알코올 중독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은 대부분 연구에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상반된 의견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상관(相關) 관계와 인과(因果) 관계를 구분하고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음악 관련 책에서는 베토벤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일종의 가족력(家族歷)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알코올 중독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는 알코올 중독과 상관 관계는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전적 질환과 같은 인과 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베토벤이 알코올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와인을 많이 마셨다고는 하지만, 당시 와인은 지금으로 치면 조금 더 비싼 음료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의학사에서 알코올 의존성 때문에 생기는 건강 문제를 지적하고 ‘알코올 중독’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베토벤이 죽은 지 20여 년 후인 1849년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때도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만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19세기 말까지 와인이나 맥주, 사과주 등 발효주는 건강 음료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가(家)의 와인 사랑은 건강한 습관


베토벤이 살던 18세기에는 상하수도 시설1)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인성 (水因性) 전염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병을 한두 번씩 경험한 이도 많았습니다. 특히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들은 흔히 내이염, 중이염 등으로 청력이 손상되는 경우가 많았고 베토벤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 상하수도 시설: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술 발전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들을 대거 탄생시켰으나 동시에 공중위생 시설의 부족 등으로 인한 전염병의 확산에 기여했다. 특히 상하수도 시설의 부족은 이 같은 공중위생의 핵심적 문제였다. 독일은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출범과 함께 네덜란드인 기술자를 불러와 베를린과 포츠담에 운하와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었다.


 


이처럼 베토벤이 청력을 잃게 된 것은 장티푸스의 후유증이기도 하고, 더 근본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위생 환경이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18세기는 오스트리아 빈, 체코 프라하 같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 같은 전염병이 더 빨리, 더 많은 이에게 퍼져 피해가 컸습니다. 때문에 더러운 물 대신 와인을 마시는 일은 이 같은 수인성 전염병으로부터 건강을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베토벤이 와인에 친숙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이른 나이에 건강을 잃고 사망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베토벤가 사람들의 와인 사랑은 건강한 습관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인과 관계를 보다 세밀하게 살피다 보면 지금까지 고려되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제3의 요인이 진짜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관관계를 인과 관계로 착각하는 것은 단순히 관련되어 있는 두 대상을 어느 하나가 원인이고 다른 것은 결과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음악 관련 서적에서 베토벤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일종의 가족력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는 부분은 재고할 여지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알코올 중독은 유전적 질환과 인과 관계가 있다기보다 당시 수인성 전염병의 확산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 판단에 가깝습니다.


1인당 술 소비량 세계 13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18세기 유럽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술에 관대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럽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한 식수에 불안을 느껴 와인에 관대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에도 생각하지 못한 인과 관계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요?



아난다마이드와 한국인의 ‘아무거나’ 문화



한국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별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한참을 고민하고 메뉴에도 없는 추가 사항을 덧붙이는 외국인들에 비하면 주문도 간단하고 특별히 자신의 취향에 따라 이런저런 요구를 더하는 법도 없습니다. ‘아무거나’라는 주문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죠.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남들의 선택을 따라 하거나, 아예 자신의 취향을 생각해본 적도 없이 ‘몰취향’으로 살아갑니다. 비단 음식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죠. 음식뿐 아니라 옷, 선호하는 브랜드나 삶의 방식에서도 자신만의 개성보다는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을 더 우선시합니다.


반면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 자신의 취향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행복감을 쉽게 느끼고 뇌에서는 아난다마이드2)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많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도박ㆍ약물ㆍ게임 등에 대해 중독자가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 많습니다. 행복한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만 끊임없이 집착하고 몰두할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피하고 막아야 하는 것에 관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무엇을 싫어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짧은 시간에도 굉장히 많은 대답을 하지만 ‘무엇을 좋아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리면서 ‘그저 아무거나’라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잘 모른다는 방증입니다.


2) 아난다마이드 (Anandamide): ‘행복’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인 ‘아난다’에서 따온 신경 전달 물질.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화학 물질로 몸속 마리화나, 내인성 모르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분비됐다가 금세 분해되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 성분이 잘 분비되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시름을 잠시 피하게 만들어주는 혹은 외면하게 만들어주는 불안 완화제, 즉 술에 몰입하기 쉬운 성격으로 살아갑니다. 외국 심리학자들이 흔히 “한국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시면서 화내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움을 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고 말합니다. 술이라는 도구가 행복이나 기쁨 촉진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만큼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술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일한 진정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들여다보면 술에 관대하기보다 술 이외의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는 법


베토벤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사가들이 묘사한 베토벤을 살펴보면 스승ㆍ연인ㆍ가족 누구와도 관계 맺기에 미숙하고, 쉽게 불화했으며, 음악 이외에는 다른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즉 중독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었던 것이죠. 

 



결국 중독이란 만성적 습관이 만들어내는 부정적 결과입니다. 특정 습관이 지속되어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가 되고, 결국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 결과를 우리가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독의 원인은 습관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특히 음주에 빠진 사람들이 가진 편견이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이 나쁜 습관을 없앨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의지만으로 나쁜 습관, 즉 중독을 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로이 보마이스터3) 교수에 의하면 나쁜 관행이나 습관을 의지력으로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무모하면서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곤해서 의지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 평소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3) 로이 보마이스터(Roy Baumeister):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 특히 그는 관행이나 습관을 의지력으로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역설하는 심리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자아고갈(Ego Depletion)’은 사람이 억지로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채찍질하면 이후 다른 상황에서 자제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거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중독을 만드는 나쁜 습관을 억제하려고만 한다면 결국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특히 그 사람의 의지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그 실패의 가능성은 극대화됩니다. 나쁜 습관은 다른 좋은 습관으로 덮어씌워야 없어집니다. 여행, 대화, 좋은 사람들과 맛난 음식 먹기 등 좋은 습관들을 만들어 대체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수많은 좋은 것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국내에 드문 인지심리학 전문가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 Austin 심리학 박사,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 한국음악지각인지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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