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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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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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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입니다.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을 음악가로 성장시켜주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독재자. 심지어 모차르트는 자신의 오페라에서 아버지와 닮은 등장인물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존경하지만 원망스러운 아버지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체 베버1)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순종하는 당신의 아들’이라는 서명과 함께 ‘계속 저를 좀 사랑해주세요’라는 절절한 호소를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레오폴트가 이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모차르트와 아버지 사이의 불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당시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명성에 맞게 모범이 될 만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그는 아들에게도 엄격한 아버지였습니다. 특히 아들이 음악이 아닌 여자 문제나 연애에 빠져들 때면 이를 꾸짖고 음악에 집중할 것을 거듭 요구했습니다.


1) 콘스탄체 베버(Constanze Weber) : 모차르트의 부인. 1782년 결혼해 9년 뒤 모차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 둘만 제외하고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흔히 낭비벽이 심한 천박한 악처로 그려지지만, 또 한편에서는 자식을 연이어 잃은 아픔과 불안정한 수입과 생활고 속에서도 남편 모차르트의 음악적 뮤즈로 끝까지 곁을 지켰다는 해석도 있다.



“너의 편지는 마치 소설과 같다.

너는 정말 연고도 없는 사람과 떠돌아다니면서

너의 명예와 늙은 부모와 누이를 저버리고

고향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셈이냐.

내 아들아, 너는 나이 어려서 이미

세계적인 명예와 명성을 획득했다.

지금 네가 하나님이 주신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일찍이 어느 음악가도 미치지 못한

최고의 명예로운 위치까지 자기를 높일 수 있느냐 없느냐,

네가 기독교인다운 생활을 해서

역사에 남는 유명한 음악가로 죽게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계집에게 사로잡혀 볏짚 위에서

굶주림에 아우성치는 자식들이 들끓는 방구석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느냐 마느냐,

그건 오직 네 마음가짐 하나에 달렸다.”


- 레오폴트가 아들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모차르트가 가수였던 알로이지아 베버와 연애 감정을 갖고 있던 시기에 아버지 레오폴트가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모차르트는 그녀와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는데, 레오폴트는 크게 분노해 이런 야멸찬 편지를 보냈습니다. 결국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아버지처럼 궁정 음악 일을 하게 됩니다. 모차르트는 음악이나 생활에 있어서 보다 자유롭고 활달한 스타일이었지만, 레오폴트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위대한 음악가에게 어울리는 엄격한 생활과 음악에의 몰두였습니다. 사실 모차르트가 이후 결혼한 콘스탄체는 알로이지아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로 알로이지아와의 연애를 그만두었던 모차르트가 이번에는 콘스탄체와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레오폴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상상이 갑니다.




이처럼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반항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의 음악에도 아버지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2)에 아버지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를 인용해 오마주를 바치는가 하면, 오페라 <돈 지오반니3)> 같은 오페라에서는 아버지와 꼭 닮은 인물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죽어서도 방탕한 주인공을 지옥으로 끌고 가 벌을 주는 모습까지, 평소 레오폴트가 아들을 대하던 태도와 흡사합니다.


자신을 음악가로 성장시켜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을 억누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사이에서 모차르트는 방황했습니다. 모차르트 부자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요.


2)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 :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아버지 레오폴트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C장조 일부와 완전히 똑같은 부분이 들어 있다. 아버지와 소원해져 있던 모차르트가 화해의 의미와 존경을 담아 바친 오마주 곡이다.


3) 돈 지오반니(Don Giovanni) : 1787년 발표된 오페라 <돈 지오반니>는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가졌던 양가적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죽은 기사장이 방탕한 주인공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내용은 아버지에 대한 모차르트의 무의식을 드러낸다는 해석이 대표적이다.



아버지 레오폴트와 크로노스 콤플렉스


우리 삶에 중요한 관계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가족 관계입니다. 모차르트에게도 가족은 지치고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장 중요한 삶의 둥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은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타인을 대할 때보다 더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지인들에게 하지 못할 행동을 가족 간에는 서슴지 않고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죄책감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거나 폭언을 내뱉는 것도 그만큼 가족이 가깝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족과 치열하게 갈등하기도 하죠.


특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무의식적인 경쟁 의식이 존재합니다. 그 기본 감정은 질투에서 비롯되는데, 질투는 원래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도예가는 도예가한테 질투를 느끼고, 공예가는 공예가에게, 그리고 거지는 거지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음악가로서 명성을 갖고 있던 레오폴트가 아들에게 느끼는 무의식 속에 질투는 없었을까요.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의 성공은 기쁨과 질투의 양가적 감정을 갖게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뿐만 아니라 모차르트를 대하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태도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크로노스 콤플렉스’에 가깝습니다. 이 용어는 그리스 신화 중 자신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집어삼킨 크로노스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기를 원하지 않는 부모의 심리 상태를 ‘크로노스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성장 후 자신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집어삼킨 크로노스 신화에서 출발한 이 용어는 모차르트와 아버지 레오폴트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합니다.


즉 자신만의 기준에 자녀들의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는 부모, 아이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난폭해지는 부모를 지칭합니다.


흔히 크로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사례로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의 관계가 인용되기도 합니다. 루크의 아버지 다스베이더는 루크에게 끊임없이 권위, 힘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지만 말을 듣지 않자 아들의 손을 자릅니다. 이렇듯 자녀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과 기준을 강요하고, 자녀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다스베이더는 크로노스 콤플렉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 속 캐릭터입니다.




궁정 음악이라는 음악적 기준과 자신의 삶의 방식을 모차르트에게 강요했던 레오폴트 역시 그런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궁정 음악을 중요한 기준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소위 ‘카펠마이스터 음악4)’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잠깐씩 궁정 음악가로 일했지만 자유 음악가의 길을 선호했던 것을 보면 아버지의 권위적인 가치관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널리 알리기 위해 레오폴트가 고집했던 유럽 연주 여행은 어린 모차르트의 육체적 성장이 지체될 정도로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4) 카펠마이스터 음악 : 카펠마이스터란 지휘자, 총감독을 의미한다. 주로 교회 음악에서 사용되던 말로 독일에서는 궁정악단의 지휘자인 궁정악장의 뜻으로 쓰였다. 한편으로 ‘카펠마이스터 음악’은 재능이 없는 악장들에 의한 진부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도 있었다.


혹사당한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모차르트는 150센티미터의 작은 키와 얽은 얼굴로 살아야 했고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요. 레오폴트가 좀 더 자신의 아들을 배려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훨씬 더 풍요로운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아버지, 하이든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파파(Papa)라고 불렀습니다. 모차르트와 무려 24세나 차이가 나는 선배 음악가였지만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전적으로 이해해주는 속 깊은 친구이자 어려울 때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가 아들 모차르트에게 명령하는 위치였다면,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늘 응원하고 지지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동등한 존재로 대하고 교류했습니다.


1787년 하이든은 프라하의 오페라 극장 관계자의 공연 요청을 받자 편지를 보내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추천합니다. <돈 지오반니>는 하이든의 배려 덕분에 프라하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하이든이 머물던 빈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그때에도 ‘몇 가지 불확실한 점이 있지만, 모차르트야말로 인류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평가했습니다. 당시 빈에서 하이든은 궁정악장이자 가장 권위 있는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의 평가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대한 논란을 잠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가 ‘비올라’를 켜고 하이든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음악적 견해를 주고받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1785년 모차르트는 3년 넘게 작곡해온 자신의 현악 4중주 6곡5)을 하이든에게 헌정했습니다. 물론 하이든도 모차르트에게 헌정곡을 남겼는데, 안타깝게도 하이든의 헌정곡 오라토리오 <사계>는 모차르트가 죽은 지 10년 후에 헌정되었습니다.


5) 현악 4중주 6곡 :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 중에서 14번 K387(봄), 15번 K421, 16번 K428, 17번 K458(사냥), 18번 K464, 19번 K465(불협화음)의 6곡은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사하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하이든 4중주곡’이라고 부른다.




아이를 모차르트처럼 천재로 키우는 일에만 관심을 둘 게 아니라 자녀에게 어떤 부모가 좋은지를 물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마음대로 선택하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내와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잠시지만 아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와 까마득한 선배였지만 모차르트를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고 배려했던 하이든. 가부장적인 문화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레오폴트처럼 크로노스 콤플렉스를 지닌 부모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하이든이 모차르트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아이는 부모와 상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이자 버팀목입니다. 스스로 더 큰 가능성을 발견할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는 부모와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를 아이에게 강요하는 부모. 모차르트의 곁을 지킨 레오폴트와 하이든의 스토리야말로 이 시대 부모들이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요.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방송, 언론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심리학의 저변을 넓혀 나가고 있다. 한국발달심리학회 회장, 한국인간발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도대체 사랑> 등 20권이 넘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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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은 100명이 넘는 제자를 길러냈지만, 정작 스스로는 이렇다 할 스승을 둔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키워낸 하이든이야말로 요즘 같은 평생 교육의 시대에 걸맞은 롤모델일 것입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음악을 갱신해나간 하이든만의 노하우는 무엇이었을까요?



즐기는 자(樂之者)의 음악이 가진 힘



‘지지자(知之者)는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요, 호지자(好之者)는 불여락지자(不如樂之者)니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널리 알려진 <논어(論語)>의 문구처럼 하이든이야말로 음악을 가장 자유롭게 즐긴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음악에는 특유의 활달함과 유연함이 녹아 있습니다. 하이든의 교향곡 <고별>1)이나 교향곡 <놀람>2)은 이 같은 그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곡입니다. 하이든의 고용주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여름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했는데, 후작을 따라간 하이든과 음악가 동료들은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1) 교향곡 <고별> : 하이든이 1772년 작곡한 제45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를 모두 마친 사람부터 한 사람씩 퇴장함으로써 사라지듯이 곡이 끝나는 이색적인 교향곡이다.


2) 교향곡 <놀람> : 북치기(Paukenschlag)라는 별칭을 가진 교향곡. 하이든이 1791년에 쓴 작품으로 제2장에서 별안간 팀파니가 곁든 포르티시모(ff: 가장 강하게)의 화음을 강하게 울려 붙은 별칭이다.


그런데 1772년 여름, 무슨 일인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후작이 돌아갈 기색을 보이지 않자 악사들의 불만은 턱밑에까지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이든은 이 같은 악단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교향곡 <고별>을 작곡했습니다.


교향곡 <고별>은 마지막 악장에 이르면 연주자들이 하나 둘씩 퇴장하는 형식의 곡입니다. 이 음악을 들은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마침내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렇게 긴 휴가를 끝내고 짐을 싸서 집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요. 자신의 교향곡에 연주자들의 고충을 담되 이것을 재치 있는 방법으로 전달한 하이든 특유의 유머가 후작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이든은 음악을 대할 때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태도가 그의 음악을 보다 창의적이고 유연한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배움이란 원래 골치 아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하이든이 음악에 대해 가졌던 태도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당시 음악을 주로 소비하던 사람들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음악은 귀족들이 사교 파티를 열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악단이 연주할 때 음악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장가 삼아 졸고 있는 청중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은 기지를 발휘해 이런 상황을 한순간에 뒤바꿔놓습니다. 교향곡 <놀람>은 조용한 2악장에서 갑자기 팀파니를 포함해 모든 악기가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냅니다. 당연히 졸음에 빠져 있던 수많은 청중은 기겁을 하며 잠에서 깼을 것입니다.




의외의 상황에 청중과 오케스트라 모두 함께 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미 상당한 유명세를 얻어 존경받고 있는 하이든이었지만, 그는 훈계하거나 불쾌해하기보다 음악으로 상황을 반전시켰습니다. 이처럼 하이든은 마치 음악이 곧 자신의 말인 것처럼 음악을 지혜롭게 활용하고 몰입함으로써, 자칫 심각하거나 불편한 상황에서도 부드럽고 유쾌하게 상황을 바꿔나갔습니다.


하이든의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은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본질적으로 매우 유연하고 열려 있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당대의 거장이라는 스스로의 지위를 강조하기보다 음악에 유머를 섞어 더 많은 흥미를 이끌어내고, 어떤 상황에서도 음악을 즐겼던 하이든의 태도는 그가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발견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이든은 즐거운 몰입과 경험을 바탕으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음악을 새롭게 갱신해나갔습니다. 흔히 내 운명의 주인은 나라고 하는데, 하이든의 인생 스토리에 꼭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하이든, 길거리 버스킹으로 음악을 배우다


지금이야 고전 음악이 멋진 공연장에서 듣는 격조 높은 문화 활동이지만, 하이든이 살던 시대의 고전 음악가들은 지금으로 치면 무명 인디 뮤지션보다 더 열악한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의 음악가라면 누구나 돈 많은 귀족에게 고용되어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평생을 지내는 것이 가장 바라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조금 대우가 낮은 교회의 성가대나 오페라 극장도 나쁘지 않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가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연회나 특별한 행사에 가끔씩 불려 가거나, 거리에서 연주를 해서 구걸하다시피 사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하이든 역시 평범한 음악가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고스란히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이든은 어린 나이에 친척의 손에 이끌려 부모 곁을 떠나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빈의 황실 교회인 성 슈테판 성당의 지휘자가 이 교회 성가대에 우연히 들렀다가 하이든의 목소리를 듣고는 빈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이든이 있었던 성 슈테판 성당 부속 소년 성가대는 오늘날 ‘세계 3대 소년합창단’으로 손꼽히는 빈소년합창단3)입니다. 하이든은 이처럼 각광받는 황실 교회의 성가대에 발탁되어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가톨릭 교회는 성가대에서 여성이 노래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변성기 전의 어린 소년들이 여성 성부를 노래했습니다.


3) 빈소년합창단 : 빈 궁정성당에 소속된 성가대로서 1498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칙령에 따라 조직되어 5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이든, 슈베르트 등이 소년 시절에 단원으로 활동했다.


 


성가대에서 뛰어난 음색으로 천상의 목소리를 자랑했던 하이든. 하지만 그는 파리넬리와 같은 유명한 카스트라토가 될 수 있는 길을 포기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길거리 연주자, 배고픈 작곡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때문에 변성기가 찾아오면 그곳을 떠나야 하는 불안한 현실이 하이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던 하이든에게 그곳에 남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습니다. 워낙 뛰어난 음악성과 목소리를 가졌기에 거세를 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남성 가수, 즉 카스트라토4)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하이든이 마음만 먹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작곡가가 아니라 파리넬리5)와 쌍벽을 이루었던 카스트라토 하이든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배고픔과 고난이 기다릴 것이 뻔한 작곡가와 안정적인 가수의 진로 가운데 작곡가의 길을 골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볼품없지만 자신의 음악성을 활짝 펼칠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한 셈인데요. 변성기가 되어 성가대에서 쫓겨난 하이든은 세레나데를 전문으로 하는 ‘가자’라는 길거리 연주단원으로 활동하며 혼자 작곡 공부를 하고 간간이 의뢰를 받아 곡을 만들면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4) 카스트라토(Castrato) : 카스트라토는 변성기가 되기 전에 거세하여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하는 남자 가수를 말한다. 여성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16~18세기 유럽에서 교회 음악이나 오페라에서 이 같은 카스트라토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5) 파리넬리(Farinelli) : 파리넬리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본명은 카를로 브로스키(Carlo Broschi)이다. 1720년에 정식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해 오페라 <아델라이데(Adelaide)>의 주역을 맡으면서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당시 길거리 공연에서는 일종의 민요를 자주 연주했는데, 훗날 하이든은 이때 친숙해진 헝가리 민요, 농부들의 축제 음악을 모티브로 한 교향곡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게다가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음악을 공부한 덕분인지 하이든은 가난한 후배 음악가를 극진히 대해주는 선배로 성장했습니다.



나의 스승은 나, 국민 음악가 하이든의 성장 비결



아마도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 가장 친숙한 하이든의 음악이라면 오래전 공중파 방송의 장수 프로그램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이었던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일 것입니다. 특히 하이든의 현악 4중주 <황제> 중 2악장은 한때 오스트리아의 국가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독일 국가의 선율이기도 합니다. 가사는 다르지만 개신교 교회의 찬송가 선율로도 사용되고 있어 교회를 다니는 분들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음악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이든은 당대에 ‘국민 음악가’라고 불러도 될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음악가로서의 위상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한참 앞질러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하이든 본인은 이런 사실을 별로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하이든은 길거리 공연 시절 이후에는 에스테르하지 궁에 속한 궁정악장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면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 음악가들 외에는 동시대 다른 음악가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립된 상황은 하이든에게 오히려 다양하고 모험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당시의 유행이나 다른 음악가들의 평가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영주는 내 모든 작업에 만족감을 표했다.

나는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았다.

나는 악단의 장으로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관찰할 수 있었다. 무엇이 감동을 유도하고,

무엇이 그 감동을 약화시키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보충하고, 잘라내고, 모험을 감행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내 주위에서는 아무도 내가 실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며,

나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나는 독창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하이든이 친구였던 마리안느 폰 켄징거(Marianne von Genzinger) 부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은 그 말뜻 그대로 교향곡이라는 전에 없던 악곡의 형식을 처음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주인공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꾸준히 작곡하면서 조금씩 그 틀을 가다듬어 마침내 교향곡 형식의 표본이 되는 확고한 기준을 마련했고, 그것이 하이든이 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입니다. 사실 하이든의 기여와 공헌은 교향곡뿐만 아니라 현악 4중주와 독주 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기악 양식의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교향곡의 아버지를 넘어 고전주의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외부의 평가나 시류에 휩쓸리기보다 오로지 자기 작업에만 몰두했던 하이든의 작업 방식이야말로 그를 교향곡의 아버지, 고전의 아버지, 국민 음악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30년 가까이 궁정에 갇혀 지낸 하이든은 화려한 사교계와도, 유행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 자신은 이런 환경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도 반항한 적도 없습니다.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만족스러웠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 교수

<SERI CEO_ ‘뮤직 인사이트’, ‘커피콘서트’> 등 고전 음악 인문학 강의의 1세대 강사.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오, 클래식>, <나를 꿈꾸게 하는 클래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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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계몽 군주들은 음악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생긴 음악당과 연주회는 새로운 시민 계급을 성장시켰습니다. 후배 음악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하이든의 행동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예술과 더불어 사회 개혁에 나선 18세기의 계몽 군주들


18세기까지 거의 모든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결국 실용 음악에 속했습니다. 예배의 경건함을 도모하거나 궁정의 연희를 흥겹게 하면서 귀족의 행사에 품격을 더하는 음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대의 작곡가 역시 대개 궁정 음악가1)이거나 교회 음악가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음악 담당 공무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 궁정 음악가 : 궁정 음악가는 안정적인 수익과 지위 때문에 대부분의 음악가가 선망하는 직업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 귀족의 취향에 복무하는 고리타분한 음악가로 폄훼되기도 했다. 18세기는 이와 같은 궁정 음악가에 대한 평가가 점차 바뀌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정치에 예속된 예술’로 좁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들이 지배하던 시절은 궁정 문화가 세속의 거의 모든 문화에 깊고 넓은 영향력을 펼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의 음악가들은 시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시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악가이자 이후 도래하게 될 시민 문화 시대를 예고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비발디와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있었기에 베토벤과 슈베르트2)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변화의 조짐은 18세기 중엽 이후 전개되었습니다. 계몽 군주, 즉 절대 권력을 지닌 군주지만 계몽주의 사상을 일정하게 받아들인 중북부 유럽의 군주들은 실력 있는 예술가를 두루 초빙하고 그들을 후원하여 궁정 문화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이 대표적입니다. 계몽 군주들과 각 지역의 귀족이나 중산계급들은 전문 음악당을 설치하고 근대적인 악단을 구성하였으며 능력 있는 작곡가를 지속적으로 후원했습니다. 파리에서는 1725년에 연속 공개 연주회가 열렸으며,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1781년에 열린 연주회는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그 장소가 지금도 유명한 게반트하우스3)입니다.


2)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 빈 고전파 이후 나타난 18~19세기 낭만주의 악파의 대표 주자로 음악의 선율에 낭만주의적 감성을 불어넣은 작곡가다.


3)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세계적인 콘서트 홀. 게반트하우스는 직물회관 또는 양복회관이라는 뜻으로, 1781년 라이프치히의 부유한 상인들이 악사를 고용, 음악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런던에서는 1762년 이후 연주회를 위한 협회가 공식적으로 창립되었으며 1771년 빈, 1790년 베를린 등 비슷한 시기에 이 같은 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히 예술가를 후원해 다양한 문화 활동이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특히 중북부 유럽의 계몽 군주와 각 지역 귀족들이 여러 사상과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이 새로운 사상과 예술로 하여금 지속적인 사회 개혁과 문화적 혁신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관습이나 양식에 의존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개혁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혁신적인 예술가들을 적극 초빙하여 거대한 시대적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하이든의 삶에는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변방 마을 로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느 음악가와 달리 하이든은 가난한 목수 부모 밑에서 컸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없었더라면 하이든은 도제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평생을 꼼꼼하고 성실한 목수로 살았을 것입니다.


계몽 군주 시대의 바흐와 시민 계급 시대의 베토벤을 이으라는 신의 계획이었을까요? 신은 그에게 풍부한 음악적 재능을 부여했습니다. 부모는 일찌감치 그의 음악적 능력을 알아보고 근처 마을인 하인부르크 학교 교장이자 성가대 지휘자인 친척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를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여섯 살 무렵 집을 떠난 하이든은 교회 성가대원이 되고 능력을 인정받아 빈으로 입성, 성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됩니다.



음악가를 지원하는 대신 저작권 등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다른 후원자들과 달리, 계몽 군주였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하이든의 창조적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후작이 하이든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지원했듯, 훗날 하이든도 후배들의 새로운 음악을 지원하고 격려했습니다.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로 길러낸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이든이 성장 과정에서 익힌 최고의 덕목은 주어진 여건에 충실하게 일하는 견실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6세 무렵 집을 떠나 하인부르크로 이주했을 때, 또 그곳에서 성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었을 때, 그리고 성년이 되어 음악가로서 직업을 얻고자 했을 때에도 그에게 요구되고 그가 가장 크게 발휘한 미덕은 성실한 직업적 태도였습니다. 때로는 일상 업무가 가혹했고 때로는 엄격한 신분 질서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이를 평생에 걸쳐 묵묵히 참으며 인내하였습니다.


전기(電氣)는 없었고 전례(典禮)는 많던 시대였습니다. 성스러운 종교 공간인 성당에서는 매일같이 미사가 올려졌고 세속의 최고 기구인 궁정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가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이 전례와 행사를 위해 매일 바쁘게 일을 했습니다. 음악가의 신분도 요리사∙마부∙정원사∙시종 등과 엇비슷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헝가리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에서 근무한 하이든은 숙명처럼 주어진 자신의 신분과 직위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궁정이나 귀족이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가는 음악가에게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고용주가 과거의 형식에 만족해 늘 비슷한 곡만 요구한다면 음악가는 평생 그 궁정에서 낡고 닳은 음악만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하이든을 고용한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계몽 군주였습니다. 빈에서 4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이젠슈타트의 대저택에서 이 후작은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향곡’이었습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걸출한 교향곡을 남겼음에도 이른바 ‘교향곡의 아버지’로 하이든이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양식을 작곡할 만한 비범한 능력이 있었고, 또 다행히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생애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생의 정점을 찍은 다음의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이든은 평생 하인 복장을 하고, 궁정악장으로서 충실히 복무했던 예술가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를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이후의 예술가들, 즉 보다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었던 시대의 음악가와 단순 비교해 궁정 예법과 신분 사회에 굴복한 예술가라는 식으로 폄하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의 불운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입니다.



시대의 징검다리를 자처한 하이든


하이든은 자기가 살던 시대에 주어진 관습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덧 자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활기차게 시작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새 시대의 개막에 동참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30년 가까이 봉직한 그는 1790년에 이윽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대저택을 나와서야 하이든은 자기의 이름이 유럽 각국에 펼쳐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그는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만년의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후배 작곡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이든은 단지 작곡 기법만 가르친 게 아니라 연금과 작품료를 털어 가난한 후배들을 경제적으로도 지원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제자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입니다.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천재 모차르트와 거침없이 시민 시대의 횃불을 들었던 베토벤이 더욱 돋보이도록 하이든이 두 사람과 교우한 것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그 시대를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저명한 선배의 추천을 받아야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하이든은 빈의 유력한 가문과 사교계에 두 사람을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교향곡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웅장한 작품을 쓰는 데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24세나 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일찌감치 간파하였습니다. 나이를 뛰어넘어 모차르트와 친구로 교류하며 현악 4중주 기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모차르트도 하이든의 배려에 감복해 6곡의 현악 4중주를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 역시 하이든의 만년의 대작, <천지창조>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808년,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기념하는 빈 연주회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을 때, 병상의 그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하자 그동안 그와 불편한 관계4)였던 베토벤은 공연이 끝난 후 무릎을 꿇고 하이든의 손에 존경과 화해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이미 세상은 베토벤의 시대였고 그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천지를 격동하던 때였지만 베토벤은 그를 바흐, 헨델 그리고 모차르트에 비견될 존재로 인정하였습니다.


4) 불편한 관계 :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처음 구상했던 1801년만 해도 베토벤은 하이든을 싫어했으나, 이 곡이 완성된 1808년 무렵에는 둘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1809년, 빈은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면서도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집 근처만은 포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 군인들을 보내 경비를 서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군인들이 경의를 표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누구보다 근면하게 살아냈고 훗날의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하이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예우였습니다.


하이든은 안정적인 직업을 바탕으로 상당한 경제적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젊은 후배 음악가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하이든이 자신의 영광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강연을 중심으로 고전 음악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 평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클래식, 시대를 듣다> 등 10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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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찬사를 받아 유명세를 얻은 모차르트였지만, 그는 음악이 궁정의 구경거리에 머물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모차르트의 진정한 천재성은 음악적 재능을 넘어 시대의 변화를 앞서 예견한 통찰력에 있습니다.



모차르트, 계몽의 시대를 읽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분명 음악사에 길이 남을 천재입니다. 그의 천재성을 예증하는 일화는 차고 넘쳐흐를 정도로 풍부합니다. 불과 여섯 살에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를 했다니 신동도 이런 신동이 없습니다. 신동 모차르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여섯 살이 되던 1762년에 떠난 유럽 연주 여행이 1766년에 끝날 정도였습니다. 뮌헨, 아우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뤼셀, 파리, 런던, 헤이그, 제네바, 베른, 취리히 등 유럽 주요 궁정에 모두 초대받았고 궁정 사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궁정의 셀레브리티였고 슈퍼스타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이런 열렬한 반응에 우쭐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천재란 시대적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외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천재도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무관한 채 특별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천재는 그 시대의 천재입니다. 각 시대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천재를 낳는 법입니다. 천재성에는 시대정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진정한 천재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를 파악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처럼 모차르트는 서른 다섯 살의 나이로 1791년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사망하기 몇 해 전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부르봉 왕가1)의 황제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와네트는 혁명이 일어나자 베르사유에서 압송되어 파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1) 부르봉(Bourbon) 왕가 : 프랑스의 왕조. 루이 13세, 루이 14세로 프랑스 절대 왕정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루이 14세에 이어 루이 15세, 루이 16세가 잇따라 왕위에 올랐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1792년 폐위되었다.


 


모차르트에 열광하던 궁정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사라지고 시민 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갑작스런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혁명의 전조는 있었습니다. 단지 명민한 사람들만이 이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는 계몽이라는 이상은 지금까지 의심받은 적 없는 낡은 질서를 의심하는 비판적 사유의 최고 형태였습니다.


사람들은 계몽의 빛을 받아들이면서 신분제조차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의 이상은 유럽을 슬며시 흔들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모차르트는 아마 아버지가 읽지 못했던 시대의 변화를 눈치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익숙한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편이었다면, 아들 모차르트는 머지않아 궁정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 예감했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대로 사회 질서가 지속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버지와 무엇인가 변화를 감지한 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모차르트는 더 이상 궁정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음악가는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다


신동도 언젠가는 어른이 됩니다. 분더킨트2), 즉 신동도 사춘기를 거치며 자의식이 생기고 자기 목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자의식이 생긴 아들과 관습을 추종하는 아버지 사이에 갈등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부자 역시 마찬가지였죠.


2) 분더킨트(Wunderkind) : 독일어로 놀라운 아이라는 뜻. 특히 음악, 문학 등 예술계의 조숙한 어린 천재나 신동을 일컫는 말로 널리 쓰인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지금까지의 궁정 음악가들이 살았던 방식대로 아들이 살기를 기대하고 강요했습니다. 우리는 모차르트를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천재 혹은 마에스트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차르트의 사후에 만들어진 명성일 뿐입니다.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의 음악가는 궁정에 소속되어 있는 수많은 하인의 한 종류였고, 음악가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시종이나 마차꾼처럼 하인의 옷을 입었고, 하인들의 부엌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하이든이 그렇게 살았고, 바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음악가의 이러한 처지에서 어떤 문제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전통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인데요. 그의 눈에 음악가는 본래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는 요한 밥티스트 백작 집의 악사였고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 봉직한 음악가였습니다. 그에겐 주어진 음악가의 처지 그 이상을 넘어서려는 야망도 궁리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호구지책이었습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천재성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때로는 서커스 공연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콘서트를 이렇게 홍보했습니다. “소년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합니다. 건반을 헝겊으로 완전히 덮어씌운 클라비어3)로 교향곡도 연주합니다. 게다가 멀리서 어떤 음을 들려줘도 정확하게 음 이름을 알아맞힙니다.” 모차르트의 재주를 흥행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업 감각을 지닌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따라온다면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들 모차르트는 성장을 거듭하며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만났습니다. 신동으로서의 인기가 점차 떨어지자 아버지는 아들 모차르트가 자신처럼 궁정에서의 안정된 일자리를 갖기 기대했습니다. 신하 음악가 혹은 신민의 처지에 충실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뜻과 달리 아들 모차르트는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3) 클라비어(Klavier) : 오늘날 피아노의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으나 1775년경까지는 일반적으로 쳄발로나 클라비코드 양쪽을 다 가리켰다. 또한 오르간이나 피아노 등 건반 악기의 건반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아들의 재능을 생계 수단으로 삼은 아버지는 궁정 음악가의 월급을 원했지만, 모차르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귀족의 후원과 월급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시민을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습니다.



궁정 예술가에서 시민 예술가로


궁정을 벗어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음악가를 시종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귀족들과 사사건건 부딪혔습니다.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25세의 나이에 궁정의 속박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에게 반발하다가 굴욕적으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아버지에게 설명하는 모차르트가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그는 악당이라느니, 타락한 놈이라느니, 온갖 모욕적인 이름으로 저를 부르고, 절더러 당장 꺼지래요……. 마침내 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어요. 은혜로우신 대제후께서는 제가 못마땅하십니까? 그가 답했죠. 네가 어찌 감히 나를 위협하는가. 불쌍하고 멍청한 어린 망종 같으니라고. 저기 문이 있어.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너 같은 쓰레기하고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


-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모차르트는 말 그대로 궁정으로부터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습니다. 엉덩이를 걷어차인 모차르트는 자유 음악가4)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4)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는 궁정에 속박받지 않는 자유 음악가를 꿈꾼 고전 음악가이기도 하다. 1790년대 그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는 듯싶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결실을 맺기도 전에 중단되었다. 음악사에 있어 자유 음악가를 말할 때 베토벤을 최초의 사례로 꼽는 의견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궁정을 벗어난 모차르트는 새로운 음악 시장에 발을 내디디며 귀족이 아니라 시민들의 희로애락을 노래했습니다. 대규모의 관중을 대상으로, 거대한 공연장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시장에서 모차르트는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그의 꿈은 안타깝게도 미완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정에서 탈출해 자유 예술가가 된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의 재주와 작품을 개방된 시장에서 판매하여 생계를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궁정에 소속되어 있던 음악가들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당시 음악 시장은 태동 단계로 입장료를 지불하는 관객을 위한 연주회를 기획하고 악보를 유통하는 출판인들이 막 생겨나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변화를 놓치지 않고 콘서트 홀로 직행했습니다. 그는 궁정에 울려 퍼지는 음악보다 누구나 귀 기울일 수 있는 콘서트 홀에 어울리는 음악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오페라는 모차르트가 이런 맥락에서 선택한 장르였습니다. 귀족들의 사교 파티를 위한 배경 음악에 불과했던 궁정 음악에서 벗어난 그는 콘서트 홀에서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1782년 오페라 <후궁 탈출>로 대성공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786년 <피가로의 결혼>, 1787년 <돈 지오반니>, 1790년 <코시 판 투테> 그리고 마침내 1791년 <마술피리>에 이르기까지 궁정 예술가에서 시민 예술가로 변한 모차르트는 오히려 작곡가로서 전성기에 도달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에는 미래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알아챌 수 있는 궁정의 시대착오를 풍자하는 유머 코드가 담겨 있는가 하면, 여주인공 수잔나는 “모든 여성은 일어서야 해 / 무자비한 남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학대받는 슬픈 여성을 지키기 위해”라는 가사의 아리아를 부르며 여성의 권리를 노래하기도 합니다. 구 질서는 자유 예술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오페라엔 궁정과 귀족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 열리게 될 근대 사회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궁정 음악가로부터 시민 음악가로 변신한 모차르트의 판단은 적절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신민의 시대가 끝나고 시민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모차르트보다 15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은 뒤를 이어 이 시대의 이상을 음악에 담았습니다. 모차르트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베토벤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모차르트가 음악의 천재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신동 모차르트는 성인이 되어 음악의 천재이자 동시에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천재로 변모하였습니다.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천재성과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성의 협주곡이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모차르트를 만들어냈습니다. 제임스 와트5)가 증기 기관을 개선해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시기는 모차르트가 궁정 음악가에서 시민 음악가로 전환하던 때와 일치합니다. 모차르트는 음악가의 방법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했습니다.


5) 제임스 와트(James Watt) : 기존의 증기 기관을 개량해 1776년 증기 기관을 상업화했다. 1783년에는 회전식 증기 기관을 완성해 탄광용 펌프를 넘어 만능동력원으로 각광을 받았다.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과 그 시대정신을 뒷받침한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가 모차르트를 통해 음악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모차르트라는 존재야말로 ‘각 시대는 그 시대에 어울리는 천재를 낳는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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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노명우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베를린 자유대학교 사회학 박사.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세상 물정의 사회학> 등 다수의 책을 썼다. 최근 TV 강연 등을 통해 사회학에 대한 저변을 넓히는 일에도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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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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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자유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자처하는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평생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감내한 이유는 귀족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궁정 음악을 벗어난 자유 음악가로의 꿈


베토벤은 궁정악단에 종사하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태생적으로 궁정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혼란과 격동이 혼재하는 격변의 시대에 베토벤은 안정적인 궁정 음악가의 길을 거부하고, 자유 음악가1)의 길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당시 자유 음악가는 감당해야 할 경제적 리스크가 큰 탓에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자유음악가의 길을 시도한 선배 음악가들이 실패했기에 그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교회가 주는 고정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개최하여 이익을 얻는 길을 모색한 비발디2)나 모차르트가 끝내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을 모두가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1) 자유 음악가 : 모차르트, 비발디가 자유 음악가를 꿈꾸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난 사례라면, 베토벤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로 자유음악가의 꿈을 실현한 고전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2) 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 이탈리아의 작곡자이자 연주자이면서 사제. 오페라 등 새로운 영역을 시도하며 음악 대중화에 힘썼지만,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흥행 요소’가 있는 음악 활동을 금지 당해 가난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 결과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것은 그 영광만큼의 커다란 고통과 고난이라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의 길을 택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랑스 혁명 후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로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군주제 아래서 군주, 귀족이 조직한 악단에서 급여를 받고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 내지 하인으로서의 음악가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모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기 시작한 상태에서 베토벤이 선택한 자유 음악가의 길은 고난이 예정된 미래나 다름없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난청 증세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고독한 운명을 이겨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토벤의 생애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더욱이 1809년이 되자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날로 위세를 떨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침략하면서 음식비가 매년 무려 50%씩이나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3)는 이와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 탄생한 곡입니다. 전쟁을 피해 귀족들 대부분이 빈을 떠났지만 베토벤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남아 창작에 집중했습니다. 자유 음악가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베토벤이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 그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전쟁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큰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악보 출판과 음악회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음악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끝없는 가난, 끊임없는 독립의 꿈


나폴레옹군의 빈 진주 당시 베토벤이 스스로 물가를 기록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은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해르텔’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구두 한 켤레를 30플로린, 코트 한 벌을 60~70플로린에 구입했는데, 1792년에는 6플로린이었던 구두를 1810년에는 30플로린에 구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서술을 보면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가 1792년에서 1810년 사이에 무려 여섯 배나 상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베토벤의 편지에는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1816년 람베르티 백작으로부터 임차한 주택으로 이사했는데, 임차료가 무려 500플로린에서 5,500플로린으로 10배 이상 올랐다.’는 푸념도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이 당시 빈의 피아노 제조업자 난네테 쉬트라이허에게 쓴 편지에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베토벤의 친구이자 악보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4)는 비교적 저렴한 빈 교외로 이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때 베토벤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벽지를 직접 도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4) 토비아스 하슬링거(Tobias Haslinger) : 음악상의 경영자이자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한 출판업자이다. 베토벤은 시외에 살며 빈 시내에 들를 때마다 하슬링거의 상점을 찾아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개인 사교장처럼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음악 도시 빈에서 명성을 얻은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생애 최초로 자신이 기획하여 수익을 갖는 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1800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극장에서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 음악가의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정신과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귀족의 후원에 기대지 않는 자유 음악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지만 악보 출판업의 부흥 등 주변 환경의 변화는 이 같은 베토벤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자신만의 음악회를 개최하고,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6~7개 유명 악보 출판사의 러브 콜을 받는 등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1807년에는 황제의 궁정 악장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전임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받았던 연봉의 두 배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황제 궁정악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작곡해야 하는 작품 중 오페라가 3번 이상 공연될 경우 세 번째 공연부터는 그 수익을 자신이 가져가고, 연 1회 개인적 음악회를 허용해 달라는 파격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물론 이 같은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베토벤이 세계 최고의 궁정악장 자리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고유의 예술 세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황제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자리도 베토벤이 가진 자유 음악가에 대한 꿈을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 혹은 소송


베토벤의 삶은 자유 음악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독립과 예술적 자유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806년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5) 공작이 오스트리아에 진격해 온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베토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토벤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원이 중단되면서 베토벤은 다시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5)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Karl von Lichnowsky) :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 모차르트에 이어 베토벤을 후원했다. 1800년부터 1806년까지 베토벤에게 매해 600플로린을 제공했으며,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걸작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베토벤이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를 알아차린 신생국 베스트팔리아 왕국의 왕이자 나폴레옹의 친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왕국의 수도 카셀의 궁정악장직을 베토벤에게 제의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연금보다 거의 네 배 이상의 거액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토벤을 빈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빈의 음악 애호가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 롭코비츠 공작이 각각 1,800플로린, 1,500플로린, 7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총 4,000플로린이 모였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가 약속한 연봉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기에 베토벤은 빈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사용하면서 통화 수단이던 플로린은 1811년에 가치가 폭락하였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약속받은 연금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루돌프 대공만이 간신히 연금을 지급하였고, 킨스키 공작은 파산 후 사망하였습니다. 롭코비츠 공작도 파산을 선언하며 연금의 지급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1813년 롭코비츠 공작과 1815년 킨스키 공작 가문에 각각 소송을 제기하여 밀린 연금을 받아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소송까지 해서 후원금을 강요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거나 베토벤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마치 6.25전쟁 직후와 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후원이 끊기자 베토벤에게 남은 수익 모델은 악보 출판업자를 통한 악보 판매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당시는 출판사에 작품을 넘기면 일회성으로 뭉칫돈을 받고 이후의 판매 독점권까지 양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과정에서 작품 번호6)를 잘 챙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출판을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잘 관리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인데요. 훗날의 일이지만 베토벤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악보 출판 시 작품 번호를 기준으로 저작권의 혜택을 받고 자유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저작권법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6) 작품 번호(Opus Number) : 오푸스(Opus)는 작품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보통 약자를 써 Op.1, Op.23 등으로 클래식 작품에 번호를 붙인다. 작품 번호는 17세기 후반 악보 출판이 활성화되며 표지에 기재되기 시작한 방식이다. 베토벤은 스스로 자신의 음악 작품에 번호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로, 그의 사후 발견된 유작에는 ‘WoO. 번호’를 매긴다. ‘WoO.’는 ‘작품 번호 없음(Werks Ohne Opuszahl : Works without Opus number)’ 이라는 뜻이다.


당시 음악가들은 초판에 한해서만 출판업자로부터 판매 수입을 배당받고 재판부터는 배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색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먼저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정식 출판하기 전 6개월에서 12개월 사이의 독점 사용권을 귀족에게 판매했습니다. 사용권이 만료되고 나면 비로소 출판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작품을 여러 번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장엄 미사곡 Op.123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출판을 시도해 작품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먼저 독일 본의 출판업자 니콜라우스 폰 짐록에게 Op.123의 3년 독점 사용권을 판매했고, 친구이자 출판업자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라이프치히의 페터스 출판사,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타리아 출판사, 마인츠의 쇼트(Schott)7) 출판사, 총 네 곳에 3년 후 판매를 조건으로 같은 작품을 재판매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장엄 미사곡의 초판 첫 페이지에 자신의 서명을 쓴 악보를 총 28개 만들어 궁정악단에 판매하고,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10개국의 주문을 받아 추가 수입을 올렸습니다.


7) 쇼트(Shott) : 베토벤과 악보 출판계약을 맺었던 출판사로 1770년 창립해 250여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 출판 기업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는 물론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클래식 거장들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귀족에게는 일정 기간 독점 사용권 비용을 받고, 이후에 다시 다양한 루트의 출판을 모색하고 여기에 초판 사인본의 판매와 해외 판매까지, 베토벤은 단 한 작품으로 수많은 버전을 만들어 재판매하며 상당한 부가 수익을 거둬들였습니다. 음악사상 실질적으로 처음 자유 음악가의 길에 들어선 베토벤은 이처럼 경제적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고, 이러한 노력은 후배 음악가들이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데 훌륭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악보에 번호를 붙이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이것은 더 많은 출판 수익을 거두기 위해 찾아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번호에는 숫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그의 고민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조병선 청주대학교 법학과 교수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법학박사. 사법연수원, 법과대학원 등에서 ‘법과 음악’을 주제로 한 강의를 하고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 진행한 <클래식 법정>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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