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을 보는 삼성화재의 새로운 관점, ‘門問, 물음을 여는 문’

고전음악가들의 인생 속 건강과 행복, 삶의 균형을 전문가의 눈으로 살피고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깊이 있는 질문과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자 합니다. 

삼성화재와 함께 삶의 혜안을 찾고 인생의 봄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18세기 계몽 군주들은 음악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생긴 음악당과 연주회는 새로운 시민 계급을 성장시켰습니다. 후배 음악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하이든의 행동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예술과 더불어 사회 개혁에 나선 18세기의 계몽 군주들

 

18세기까지 거의 모든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결국 실용 음악에 속했습니다. 예배의 경건함을 도모하거나 궁정의 연희를 흥겹게 하면서 귀족의 행사에 품격을 더하는 음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대의 작곡가 역시 대개 궁정 음악가1)이거나 교회 음악가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음악 담당 공무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 궁정 음악가 : 궁정 음악가는 안정적인 수익과 지위 때문에 대부분의 음악가가 선망하는 직업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 귀족의 취향에 복무하는 고리타분한 음악가로 폄훼되기도 했다. 18세기는 이와 같은 궁정 음악가에 대한 평가가 점차 바뀌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정치에 예속된 예술’로 좁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들이 지배하던 시절은 궁정 문화가 세속의 거의 모든 문화에 깊고 넓은 영향력을 펼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의 음악가들은 시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시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악가이자 이후 도래하게 될 시민 문화 시대를 예고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비발디와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있었기에 베토벤과 슈베르트2)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변화의 조짐은 18세기 중엽 이후 전개되었습니다. 계몽 군주, 즉 절대 권력을 지닌 군주지만 계몽주의 사상을 일정하게 받아들인 중북부 유럽의 군주들은 실력 있는 예술가를 두루 초빙하고 그들을 후원하여 궁정 문화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이 대표적입니다. 계몽 군주들과 각 지역의 귀족이나 중산계급들은 전문 음악당을 설치하고 근대적인 악단을 구성하였으며 능력 있는 작곡가를 지속적으로 후원했습니다. 파리에서는 1725년에 연속 공개 연주회가 열렸으며,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1781년에 열린 연주회는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그 장소가 지금도 유명한 게반트하우스3)입니다.

 

2)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 빈 고전파 이후 나타난 18~19세기 낭만주의 악파의 대표 주자로 음악의 선율에 낭만주의적 감성을 불어넣은 작곡가다.

 

3)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세계적인 콘서트 홀. 게반트하우스는 직물회관 또는 양복회관이라는 뜻으로, 1781년 라이프치히의 부유한 상인들이 악사를 고용, 음악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런던에서는 1762년 이후 연주회를 위한 협회가 공식적으로 창립되었으며 1771년 빈, 1790년 베를린 등 비슷한 시기에 이 같은 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히 예술가를 후원해 다양한 문화 활동이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특히 중북부 유럽의 계몽 군주와 각 지역 귀족들이 여러 사상과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이 새로운 사상과 예술로 하여금 지속적인 사회 개혁과 문화적 혁신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관습이나 양식에 의존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개혁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혁신적인 예술가들을 적극 초빙하여 거대한 시대적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하이든의 삶에는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변방 마을 로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느 음악가와 달리 하이든은 가난한 목수 부모 밑에서 컸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없었더라면 하이든은 도제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평생을 꼼꼼하고 성실한 목수로 살았을 것입니다.

 

계몽 군주 시대의 바흐와 시민 계급 시대의 베토벤을 이으라는 신의 계획이었을까요? 신은 그에게 풍부한 음악적 재능을 부여했습니다. 부모는 일찌감치 그의 음악적 능력을 알아보고 근처 마을인 하인부르크 학교 교장이자 성가대 지휘자인 친척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를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여섯 살 무렵 집을 떠난 하이든은 교회 성가대원이 되고 능력을 인정받아 빈으로 입성, 성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됩니다.

 

 

음악가를 지원하는 대신 저작권 등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다른 후원자들과 달리, 계몽 군주였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하이든의 창조적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후작이 하이든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지원했듯, 훗날 하이든도 후배들의 새로운 음악을 지원하고 격려했습니다.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로 길러낸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이든이 성장 과정에서 익힌 최고의 덕목은 주어진 여건에 충실하게 일하는 견실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6세 무렵 집을 떠나 하인부르크로 이주했을 때, 또 그곳에서 성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었을 때, 그리고 성년이 되어 음악가로서 직업을 얻고자 했을 때에도 그에게 요구되고 그가 가장 크게 발휘한 미덕은 성실한 직업적 태도였습니다. 때로는 일상 업무가 가혹했고 때로는 엄격한 신분 질서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이를 평생에 걸쳐 묵묵히 참으며 인내하였습니다.

 

전기(電氣)는 없었고 전례(典禮)는 많던 시대였습니다. 성스러운 종교 공간인 성당에서는 매일같이 미사가 올려졌고 세속의 최고 기구인 궁정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가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이 전례와 행사를 위해 매일 바쁘게 일을 했습니다. 음악가의 신분도 요리사∙마부∙정원사∙시종 등과 엇비슷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헝가리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에서 근무한 하이든은 숙명처럼 주어진 자신의 신분과 직위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궁정이나 귀족이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가는 음악가에게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고용주가 과거의 형식에 만족해 늘 비슷한 곡만 요구한다면 음악가는 평생 그 궁정에서 낡고 닳은 음악만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하이든을 고용한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계몽 군주였습니다. 빈에서 4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이젠슈타트의 대저택에서 이 후작은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향곡’이었습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걸출한 교향곡을 남겼음에도 이른바 ‘교향곡의 아버지’로 하이든이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양식을 작곡할 만한 비범한 능력이 있었고, 또 다행히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생애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생의 정점을 찍은 다음의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이든은 평생 하인 복장을 하고, 궁정악장으로서 충실히 복무했던 예술가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를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이후의 예술가들, 즉 보다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었던 시대의 음악가와 단순 비교해 궁정 예법과 신분 사회에 굴복한 예술가라는 식으로 폄하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의 불운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입니다.

 

 

시대의 징검다리를 자처한 하이든

 

하이든은 자기가 살던 시대에 주어진 관습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덧 자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활기차게 시작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새 시대의 개막에 동참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30년 가까이 봉직한 그는 1790년에 이윽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대저택을 나와서야 하이든은 자기의 이름이 유럽 각국에 펼쳐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그는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만년의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후배 작곡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이든은 단지 작곡 기법만 가르친 게 아니라 연금과 작품료를 털어 가난한 후배들을 경제적으로도 지원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제자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입니다.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천재 모차르트와 거침없이 시민 시대의 횃불을 들었던 베토벤이 더욱 돋보이도록 하이든이 두 사람과 교우한 것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그 시대를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저명한 선배의 추천을 받아야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하이든은 빈의 유력한 가문과 사교계에 두 사람을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교향곡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웅장한 작품을 쓰는 데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24세나 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일찌감치 간파하였습니다. 나이를 뛰어넘어 모차르트와 친구로 교류하며 현악 4중주 기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모차르트도 하이든의 배려에 감복해 6곡의 현악 4중주를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 역시 하이든의 만년의 대작, <천지창조>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808년,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기념하는 빈 연주회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을 때, 병상의 그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하자 그동안 그와 불편한 관계4)였던 베토벤은 공연이 끝난 후 무릎을 꿇고 하이든의 손에 존경과 화해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이미 세상은 베토벤의 시대였고 그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천지를 격동하던 때였지만 베토벤은 그를 바흐, 헨델 그리고 모차르트에 비견될 존재로 인정하였습니다.

 

4) 불편한 관계 : 하이든이 <천지창조>를 처음 구상했던 1801년만 해도 베토벤은 하이든을 싫어했으나, 이 곡이 완성된 1808년 무렵에는 둘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1809년, 빈은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면서도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집 근처만은 포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 군인들을 보내 경비를 서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군인들이 경의를 표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누구보다 근면하게 살아냈고 훗날의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하이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예우였습니다.

 

하이든은 안정적인 직업을 바탕으로 상당한 경제적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젊은 후배 음악가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하이든이 자신의 영광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삼성화재 VIP 매거진 문문

 

글쓴이: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강연을 중심으로 고전 음악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 평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클래식, 시대를 듣다> 등 10여 권의 책을 썼다.

 

 

더 궁금하다면?

 

▶ 베토벤의 습관, 한국인의 중독 (클릭)

▶ 귀를 통해 재능을 대물림한 모차르트가(家) (클릭)

▶ 몰입에서 찾은 하이든의 행복 비결 (클릭)

▶ 베토벤, 자신의 음악에 넘버를 붙이다 (클릭)

 

새 시대, 새 시장을 발견한 모차르트 (클릭)▶ 하이든, 미래 세대에 자신을 투자하다 (클릭)

▶ 불운마저도 배움의 기회로 삼은 하이든 (클릭)

▶ 모차르트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클릭)

▶ 베토벤, 사람이 아니라 시대로부터 배우다 (클릭)

다양한 보험 정보와 생활Tip이 궁금하다면? 

삼성화재 SNS와 친구가 되어주세요 :)

 




삼성화재 프로포즈
열심히 준비한 글, 어떠셨어요?